침부터 가랑비가 조금씩 내린다. 바람이 좀 불긴 하지만 산행 하기 크게 나쁘진
않겠다. 오늘은 자주 가보지 못한 통일전 쪽의 문화재 들을 둘러 볼 계획이다.
통일전에서 - 남산 한옥마을을 통과하여 - 칠불암쪽 깊은계곡으로 들어가서 -
좌측능선을 타야 건너 칠불암쪽 산세를 구경할수있고 돌아올때 칠불암쪽으로
내려 오면서 이쪽 능선의 암봉등 산세를 고루 볼수있다 - 봉화대를 거쳐 -
고위봉으로 올라갔다가 - 다시나와서 - 칠불암을 거쳐 하산하여 - 서출지 -
정강왕릉 - 화랑교육원 - 전국최대 수목원 - 보리사 관음보살상은 건너뛰고-
사천왕사지와 선덕여왕릉 - 안압지, 첨성대 -연꽃단지 준비를 둘러볼 계획.
통일전(統一殿)
신라가 이룩한 삼국 통일의 위엄을 기리고, 한국의 통일에 의지와 염원을 밝히기 위한 것이며,
역사적 의의와 통일전을 세운 깊은 뜻을 밝힌 기념비가 있다.
통일전에는 또한 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운 신라의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 그리고 삼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문무왕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태대각간 김유신 사적비, 문무대왕 김법민 사적비, 태종무열왕 김춘추 사적비
신라 삼국통일 기념비
문무대왕 영정
통일전 인근이 남산동인데 대부분 골기와의 한옥으로 이루어져
이 동네를 들어오면 마치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다
무쏘 차량이 한옥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 20년 넘은 내 차다 ㅋ ㅋ )
1000여년 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길은. 남산리삼층석탑을 지나고 염불사지를 지나면 산길이
시작된다. 초입의 흙길은 잘 비질한 절집의 마당같이 정갈하고 늦은 봄꽃들이 앙증맞다.
1000년 전 신라 사람들이 불심으로 드나들던 그때도 이 길의 정취가 그랬을까 -
경주의 불국사나 황룡사, 석굴암 등이 지배층의 대작불사로 왕족과 지배층의 공간이었다면
남산은 백성들의 불심을 보듬은 곳이었다. 왕족들이 화려하고 우람하고 거대한 절집을 세웠다면,
백성들은 아예 남산을 통째로 불국토를 이루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삼국통일의 와중에 전쟁터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을 백성들의 신산한 삶과
그들이 닿고자 했던 이상세계를 남산에 그려내려 했던 것은 아닐까.
남산의 숲길에서 저절로 부처를 만나러 오갔을 신라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남산의 솔 향기가 폐 깊숙히 들어온다
좌측 능선을 타고 올라오다 돌아보니 남산마을과
신라의 옥답이 아스라히 보인다
저 건너 팔부능선 바위벽아래 칠불암이 보일듯 말듯 하네
남산은 어디를 가나 동글 동글한 암벽이 적당히
자리잡고 그사이 사이로 노송들이 천년을 지켜오고 있다
봉화대는 국가의 중요한 통신기관으로서 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이 나 또는 변경의 기지에 알리는 동시에 해당지방의 주민에게 알려서 위급한 사항에 신속하게 대처하도록 마련한 것이다.
봉수는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로 알리는 것으로 평상시에는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경계에 접근하면 셋, 경계를 침범하면 넷, 경계에서 적과 아군이 접전중이면 다섯을 올리도록 하였다
전국의 봉수망은 5대 기간선로로 구성되었는데
제1로는 함경도 경흥에서 시작하여 강원도를 거쳐 서울의 목멱산(지금의 남산)에,
제2로는 경상도 동래에서 충청도를 거쳐 서울에,
제3로는 평안도 강계에서 내륙으로 황해도를 거쳐 서울에,
제4로는 평안도 의주에서 해안을 거쳐 서울에,
제5로는 전라도 순천에서 충청도를 거쳐 서울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제1로, 3로, 4로는 몽고, 여진, 중국 등 북방 민족의 침입을,
제2로, 5로는 일본의 침입을 경계하여 이에 대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봉수에는 직선봉수와 간선봉수가 있는데 직선봉수는 기간선로의 것이고
간봉은 그 보조선을 말합니다.
또, 봉수대의 설치지역에 따라 남산에 설치한 경봉수와 바닷가나 국경의 제일선을 따라
전달되는 연변봉수,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중간봉수로 대다수를 차지하는
내지봉수로 나뉩니다.
연대는 주로 선박이 접안하기 쉬웠던 해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는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높이와 너비가 10척 내외로 돌로 쌓았다고 하네요.
봉화대가 있었던 곳, 돌담 잔해에 잡목만 무성하구나 -
문화재 보호를 위해 출입을 통재하는 줄을 쳐놓았다
봉화대 당터에는 무너진 돌 몇개만 쓸쓸하게 자리하고 - -
10:30분 부터 헤매었더니 1시가 가까워 오네 ?
내자가 해준 만두가 아직 따끈하다 -
가랑비를 피에 솔숲에 숨어서 허기를 좀 채우고 -
습기 듬북 머금은 남산이 소나무 가지에 올랐다
이무기 능선
경주남산 - ! 아름답지 않소 - - ?
보통 고위봉에 오면 아래로 빠져 산 중턱에 있는 녹원정사의 비빔밥에
동동주를 많이들 먹는다
저 위 통일전에서 현위치 고위봉까지 약 5kM 정도
저 아래 솔가지 사이로 녹원정사가 보인다
녹원정사에 봄이면 그야말로 봄동산이다.
집 뒤의 아름드리 살구나무 꽃그늘 아래에 돗자리 깔고
떨어지는 꽃잎 소리를 들으며 먹는 점심은 진수성찬 따로없다.
나물, 장아찌, 된장찌개, 콩비지, 묵은지에 꽃대 오른 월동초 한줌 얹어진 밥상은
그냥 먹어도 좋고, 비벼 먹어도 좋다.
여기에 동동주 한 사발을 더하면 신선이 부러우리오!!!
녹원정사 내려가는길
녹원정사 먹는타령은 내자가 만들어준 만두찜으로 대신하고
고위봉에서 다시 돌아나와 칠불암으로 향한다
칠불암 약 100m 정도 위에서 -
그 바위 참 요 -- 상하게 생겼다
거인의 화장실인감 - - - ?
이쪽 길은 거의 바위를 타고 내려갑니다.
기와 조각 이정표가 정답게 길안내
신선암 우리가 말하는 칠불암입니다
칠불암 바로 위의 깍아지른 벼랑에 새겨진 마애 보살 반가상
천년전의 장인정신에 다시한번 고개 숙여 집니다
건너편 오전에 올라올때 타고왔던 능선이 정말 아름다운데
사진에 그 효과가 잘 나타나지 않네요
저 능선의 아름다움을 볼수 있도록 보통 산행코스를 잡습니다
이 마애보살반가상은 보물 제 199호로 칠불암(七佛庵) 위에 곧바로 선 남쪽바위에 새겨져 있다.
마치 구름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머리에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어서 보살상임을
알수 있다. 얼굴은 풍만하고, 지그시 감은 두 눈은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구름 위의 세계에서
중생을 살펴보고 있는 듯하다. 오른손에는 꽃을 잡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서
설법하는 모양을 표현하고 있다. 천의(天衣)는 아주 얇아 신체의 굴곡이 사실적으로 드러나 보이며
옷 로자락들은 대좌(臺座)를 덮고 길게 늘어져 있다.
이 불상의 특징은,자세히 보면 오는발을 의자 아래로 내려 연화대를 밟고있는 반가좌를 하고 있다.
이러한 자세를 유희좌(遊戱座)라고 하는데 좀처럼 보기힘든 마애불이다.
발 아래 화려한 구름이 동적이어서 구름에 떠 가는 자유자재한 형상을 나타내고있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갖춘 광배(光背) 자체를 불상이 들어 앉을 공간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보살상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며, 통일신라시대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인다.
이 깍아 지른 벼랑을 타고 불상을 새긴 선조의 장인정신에
다시한번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 바위를 보호하고자 받쳐놓은 돌 받침대
지금까지 천년은 버텨왔지만 앞으로의 영겁은
어떻게 지탱할꼬 - - - -
발아래 칠불암이 보이고 건너편 산은 오전에 내가 올랐던 산이다
(가깝게 보이지만 한참을 내려가야한다)
이렇게 바위를 타고 밧줄도 타고 한참을 - -
더디어 일곱 부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국보제 321호 경주 남산 칠불암
칠불암 마애불상군은 절집 마당의 암벽을 등지고 서있다. 높은 돋을새김으로 돌을 쪼아낸 석공의 솜씨에 탄성을 지르게
된다. 1000년도 넘는 시간의 저편에서 새겼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다.
넓은 암벽에 새겨진 본존불과 그 양옆으로 선 협시보살, 그리고 그 앞의 직육면 바위에 사방으로 새겨진 불좌상. 이렇게
일곱 불상 들이 한데 모여서 그려내는 모습이 빼어나다. 불상의 둥근 눈두덩이며, 대좌로 삼은 연꽃이며, 옷깃의 하늘
하늘한 옷자락 주름 까지도 선명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그 불상에서 보아야 할 것은 이런 조형미만은 아니다. 마애
불상군에서 정작 느껴야 할 것은 그 앞에 두손을 모으고 간절한 소망을 빌었을 1000년도 더 지난 세월의 저편에 살던
신라인들의 마음이다. 칠불암의 마애불을 만 나려고 신라 사람들은 저 아래의 마을에서 이리도 긴 숲길을 걸어 올랐을
것이고, 그렇게 당도한 불상 앞에서 마음 안쪽에 깊이 담아온 소망을 풀어놓았을 것이었다. 일곱개나 되는 불상 앞에서
그들은 무엇을 빌었을까. 무슨 간절한 소원이 있었을까. 거친 산길을 타고 그들을 여기까지 오르게 한 힘이란 어떤 것
이었을까.
원래의 칠불암은 오랜 세월속에 절은 폐사되고 불상만 남게되었다 -
이 불상 또한 천녀을 지나면서 칡넝쿨과 대숲들에 얽히고 가려 있던것이
80여년전 아랫마을 황씨 할머니가 산나물을 케던 도중 발견되어 세상밖으로
나오게 되었다한다.
이 할머니가 작은 암자를 짓고 불공을 드렸던곳이 지금 3번이나 절간건물도
스님도 바뀌었단다
이 칠불암 앞의 작은 기도마당 앞에는 그림을 그려놓거나 소원을 담거나 마음의글을 담은
기와들이 옹기 종기 도열해 있다.
원래는 외국에서온 효공스님인가 - ? 하는 여승이 머물면서 기와에 예쁜그림을 그려
놓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하며 지금 이 스님은 떠났으나 그의 그림은 아직도 정겹게
남아 있다.
잘 덮인 지붕에 비가 새지 않듯이 수행이 잘 된 마음에는
욕망이 스며들 틈이 없다. 법구경 도 쓰놓고 - - -
칠불암 건너편의 산봉우리가 아름답다
칠불암 약수터
여긴 정말 약수다. 아무리 가물때에도 이우물은 그대로다
사이다를 마시면 싸아 한 맛에 입을 벌리듯
칠불암 약수의 차거운 맛은 - - - - - -
칠불암 깊은 계곡의 맑은 물은 피라미들의 놀이터네 - - ?
남산의 보배는 역시 소나무다. 솔향이 넘쳐나는 경주남산은
바위와 노송이 전부다. 그래서 남산 송이가 전국 제일의
고가 인것은 그 향이 지극하기 때문이다
나약한 인간들, 바램의 흔적이 곳곳에 - -
'1000년의 노천박물관'이라 일컫는 경주 남산에는 칠불암의 마애석불군이나 신선암 마애불 말고도
127개의 불상이 더 있다.
99개의 탑과 22개의 석등도 있다. 도합 150개의 절집이 섰던 터도 있다. 갈 때마다 다른 능선을 타고
몇 번을 오른대도 다 못볼 것들이다. 남산 정상을 넘어가며 가장 많은 불상을 만날 수 있는 삼릉에서
용장까지를 걸어봐도 좋겠고, 동남산을 타고 오를 수도 있겠고, 포석정에서 출발해 저 아래 사바
세계를 내려다보는 늠비봉석탑을 지나서 금오정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택할 수도 있겠다.
어느 곳을 찾은들 어떨까. 남산의 산길을 걷노라면 세련되면 세련된 대로, 투박하면 투박한 대로,
1000년도 훨씬 넘은 시간 속에 잠겨 있던 석물들이 신라 사람들의 소망과 기원을 간직한 채 맞아줄 것
이니…. 남산을 오를 때마다 매번 참 희한하다고 느꼈던 것은 경주시내에 그득한 유적들은 한번 보면
기억 속에 인화된 사진처럼 오래도록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지만, 남산을 올라서 만났던 석불이며
석탑들은 곧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만다는 것이었다. 그건 아마도 노천의 유물들이 온전히 '그것만의
형태'가 아니라 유물들이 서있는 자연들과 함께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리라. 그날의 계절이나 햇빛과
바람, 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면서 자연의 일부가 돼서 정물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란 얘기다. 1000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오는 동안 어느새 자연과 닮아있어서일까.
그래서 남산은 한번 발을 들인 뒤에는 그 희미해진 잔영을 쫓아 언제고 다시 찾게 되는 것이리라.
이렇게 하산하여 통일전 인근 서출지로 향한다
소지왕과 서출지 (사적 138호)
(서출지와 까마귀 제삿날)
신라 제21대 소지왕 때의 일이다
왕이 천청정에 거동하였을 때
까마귀와 쥐가 몰려와 울부짖었다
그 가운데 한 쥐가 사람의 말을 하면서 이르기를
까마귀가 날아가는 곳을 놓치지 말고
쫓아가면 반드시 무슨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상히 여겨 따라가 보라 명하니
까마귀는 남쪽으로 날아가더니
남산 동쪽 기슭에 이르렀을 때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보다가
까마귀가 날아가는 곳을 놓치고 말았다
길가에서 방황을 하고 있는데
한 노인이
연못에서 나와 편지를 주며 말하기를
만약 이 편지를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게 될 것입니다 하여
신하가 돌아와서 왕에게 편지를 바치면서
이 사실을 전하니 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죽는 편이 낫다하여 편지를 보지 않기로 하였는데
점을 보는 관원이 아뢰기를 두 사람이란 서민을 말함이요
한 사람은 왕을 일컫는 말이오니 떼어보는 것이 좋다고
권하여 떼어 본 결과 거문고 집을 쏘라고 쓰여 있었다
왕은 궁으로 돌아와 즉시 거문고 집을 화살로 쏘았더니
내전의 중과 왕비가 은밀히 간통하고 왕을 해하고저 숨어있었다
왕이 크게 노하여 두 사람을 사형에 처하였다
그 후로부터 매년
첫 해일(亥日) 자일(子日) 오일(午日) 등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여 움직이지 않는 풍습이 생겼다
15 일 날은 까마귀의 제삿날이라 하여 찰밥으로
제사하는 풍습이 행하여졌으며 노인이 연못에서 나와
편지를 전했다하여 그 연못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불렀다
연못 서북쪽에 위치한 목조 건물은
조선 현종 5년에 임적 이라는 사람이 못 가에 "이요당(二樂堂)" 이라는 정자를 지어
글을 읽고 경치를 즐겼던 정자라고 한다.
밤에 찾는다면 더욱 아름다운 야경으로 빛나는 서출지를 감상할수 있다
통일전에서 조금만더 시내 쪽으로 내려오면 길가에
푯말이 있고 여기서 이길로 100m가면 정강왕릉이다
사적 186호 정강왕릉
정강왕은 신라 50대 왕으로 제위 2년밖에 지나지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보리사를 사이에 두고 형제인 선왕 헌강왕릉 인근 송림에 릉이 있다
급작 스런 병고로 누이인 덕만 ( 진성여왕)이 왕을 이었다
경북 산림 환경 연구원은 화랑교육원 옆에 대단한 규모로 자리하고 있다.
총 포지면적이 40ha 에 수목현황은 910종 5십6만본이나 된다.
아래와 같은 시설로 견학신청도 받고 일반인들께도 개방하고 있다
휴일이나 평일에도 가족단위 단체가 많이 찾는데 워낙 넓고 깨끗하여 붐비는 감은
조금도 없고 오히려 조용하고 낭만적이라 아베크족들이 거닐기에도 좋다
시내로 오는길에 안압지 부근 연꽃단지 작황을 둘러보니
연잎들이 물방울을 머금고 열심히 자라나고 있었다.
여기는 첨성대앞이다. 첨성대앞에 언제 이렇게 작약을 심었기에
이렇게 예쁘게 피었을까. 인근에 있었어도 처음 보네 - ?
저 --- 끝에 첨성대 보이죠 - - ?
이렇게 해서 집에오니 오후 5시가 가까워 옵니다. 아직 날씨는 고르지 못한데
이제 샤워나 하고 좀 쉴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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