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답사

영천지역,조양각,거조사,은해사등(24.10.24)

죽전일지 2024. 10. 27. 11:09

오늘은 인문학 동인들과 영천지역 문화재답사 하는날

들녁에 가을이 익고 단풍이 더욱 붉어지는날씨다.

 

조양각(朝陽閣)

조양각은 고려 공민왕때 지은 건물로 영천 금호강변에 자리하는 누각. 

이 지역 사람들은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와 함께 영남3루라 부른다.

"멀리 훤히 트인 경치를 바라보니 눈조차 더 밝아 지는듯하다"

하여 "명원루" 라고도 부른다. (아래 현판사진 참고)

 

공원내에 "황성옛터"노래비가 있어 우린 옆 전시관에 둘러앉아

색스폰으로 황성옛터와 함께 옛노래를 감상하며 떼창도 하였다.

 

나는 황성옛터의 황성이 임금皇 인줄로 알고있었는데 거칠荒으로

"오래되어 황폐해진 성"  당시 노래의 주관지인 개성의 허물어진 성에

대한 노래를 황성옛터 로 했다하네 ㅎ 

 

 

영천은 삼한시대 골벌국

진한지역 수많은 소국중 하나인 사로국(경주방면).

음즙벌국(안강포항방면). 골벌국(영천방면) 등이었던 골벌국.

 

영천문화 전시관에서 황성옛터를 부르고 -

 

1928년 전수린 작곡, 왕평 작사, 이애리수 노래

당시 이들이 속한 극단이 개성 공연때, 

흔적조차 없는 찬란했던 고려국의 폐허가 된

만월대를 보고 지은노래. 일본과는 사실 아무연관이 없으나

왜정때 조선총독부는 금지곡으로 공고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 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 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어 있노라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 한 없는 이 설움을 가슴 속 깊이 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 터야 잘 있거라

 

 

 

 

즐거운 점심식사 시간

 

임고서원(臨皐書院)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키위해 조선 명종(1553년)때 지은 사액서원

사액(賜額)서원: 국가정책에 의해 지원을 받아 세운 서원.

임난때 소실 선조때 재 사액받고 서원철폐령에 훼철 되었다가 

1965년에 복원하여 포은선생만 복향 하다가 1980년부터  차례로

건물을  지어 현재에 있다한다.

 

 

임고서원 은행나무. 경상북도 기념물( 수령 약 500년 추정)

이나무는 원래 임고서원 있던 부래산에 함께 있었으나

임난때 소실되고 1600년경 현위치에 복원후 옮겨심었다함.

 

 

선죽교(개성에 있을 선죽교가 여기에 와 있넹)

북한 국보 150호 선죽교는 고려 태조 왕건이

1919년 송도(지금의 개성) 시가지 정비때 축조.

정몽주선생이 이방원에 피살된곳으로 원래는 선지교라

불렀는데 피살된날 밤 다리옆에서 참대가 솟아나왔다하여

선죽교로 고쳐불렀다전한다. 

고려때는 돌난간이 없었으나 1780년 정조때 정몽주후손이

개성유수로 부임하여 선조가 죽은자리 우마차가 다님을

안타깝게여겨 난간을 가로로 설치하여 통행을 제한하는대신

행인을 위해 옆에 돌다리를 하나더 가설하였다.

 

이번 서원 재건하면서 개성 선죽교를 실측하여 여기다

가설하였고 석봉이 쓴 글씨도 탁본하여 새겼다 

 

리에 난간을 가로로 설치하여 통행을 제한 하는

대신 옆에 또하나의 다리를 놓았다

 

포은 박물관

 

 

포은의 단심가 :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 - -

           백로가 : 가마귀 우는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

 

영천 거조사(居祖寺)

아미타불(조,祖)이 계시는(거,居) 절(사,寺)로 아미타불이

항상 머문다는뜻.

원래 은해사보다 먼저 지어졌다.(신라 효성와  또는 경덕왕때 창건)

이후 어떤사유인지 밝혀진바 없으나 은해사의 말사가되어

거조암이라는 암자로 불렸다.

2007년에 조계종으로부터 거조사로 절명을 받았다.

1375년 고려 우왕때 영산전을 건립 오백4나한을 모셨다.

1785년 조선정조때 영산전에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를 조성. 

 

 

 

영산전과 오백나한상(국보 제14호)

돌계단을 오르는 비교적 높은 기단위에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은 영산전은 거조암의 중심건물로 석가모니불과 석조나한

526위가 모셔져있고 그표정 자세가 각각다르며 1805년 순조때

"영파성규"스님이 오백나한상에 모두 이름을 붙였다.

지붕은 옆면서 보았을때 사람인(人)자 모양인 맛배지붕으로꾸며

고려말 조선초 양식으로 중요 문화재로 평가되며 현재 남은

고려시대 건축물로는 이 영산전과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뿐이다.

 

팔공산 은해사(銀海寺)

괘불탱화 :보물 제1270호)

청동북및 북걸이 (보물1604호)

백흥암 수미단 (보물468호)

백흥암 극락전(보물790호)

운부암 금동보살좌상(보물514호)

불,보살,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같다.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끼고

구름이 피어날때면 은빛바다가 물결치는듯하여 은해사라 불렸다함.

 

은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본사로 경북지역 대표적사찰

본존불을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

 

신라 41대 헌덕왕이 선왕인 조카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되면서 

조카의 원혼을 달래고 나라와 백성의안녕을 위해 운부암 가는길

해안평에다 혜철국사로 하여금 "해안사"라는 이름으로 창건.

중창에 중창을 거듭한 대가람으로 있다가 1545년 인종때 큰 화재로

사찰이 전소되었다.,

이듬해 1546년 명종때 지금의 자리에 옮겨 나라의 보조금으로 새로

절을 지었다. 이때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라 이름을 지었다.

 

현존하는 암자가 8개, 말사숫자가 50여개에이르며 종립 승가대학원이

있는 사찰이다.

 

은해사 출신스님으로 원효스님. 의상스님. 보조국사 지눌스님.

삼국유사 일연스님등이 있다.

 

수호사찰

인종의 태실:중종과 장경왕후사이에 터어나 8개월재위후 30세에 졸.

영조의 어제 수호완문: 영조가 왕자시절 은해사를 잘 수호하라는

완문을 보낸일이 있었고 임금된후 은해사가 외부로부터 보호를 받음.

 

추사 선생의 글

헌종14년 추사가 유배에서 방면되어 서울에 2년정도 머물때

영조의 수호완문을 보장하는 사찰과 영파대사의 묵은인연을 생각하고

은해사 현판과 문액을 기꺼이 써 주기로 한것같다.

고종16년 영천군수 이학래가 쓴 "은해사 연혁변"에 "문액의 "은해사"와

대웅전, 보화루가 모두 추사 김시랑의 글씨이고 노전을 "일로향각"이라

했는데 역시 추사의 예서체라 하고있다.

간송미술관 최완수 선생 또한 은해사의 추사글씨는 나무랄데없는 

절묘한 필획의 추사체라 하였다.

추사글씨 : 은해사, 대웅전, 보화루, 불광각, 일로향각 5점

 

은해사 성보박물관

여기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은해사의

부속암자와 말사에서 나오거나 소장하고 있던 문화

유산을 가득 담고있다.

은해사에 전하는 괘불탱화, 청동북과 북걸이,

염불왕생접경조 등 국가문화유산도 모두 이곳에 들어있는데

아쉽게도 내부 촬영이 금지네요.

 

 

아래 그림은

"업경대"라 하여 "지난 과거를 돌아볼수있는 거울"로

실물은 박물관 안에 있는데, 박물관 벽화에 그려져 있어

사진에 담았음.

 

야외에 세워진 불두

무언가 이야기가 있을법한데 - - -

 

이렇게 가을의 해가 서산에 넘어가고 뜻깊은 영천답사의

하루가 지는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