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사지(?藏寺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조상사적비로서 높이 1.33m, 보물 제125호. 비신(碑身)은 국립중앙박물관 보관되어 있으며 절터에는 비신을 받쳤던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다. 이 비는 신라 제39대 소성왕의 비 계화부인(桂花夫人)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미타불상을 조성할 때 세운 것으로, 건립연대는 801년으로 추정된다. 이수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여섯 글자를 2행으로 새겼는데, 이수 왼쪽 면에는 김정희(金正喜)의 조사기가 별도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쌍귀부는 일부 파손되 있으며 이수의 일부분도 부러졌다. 귀부의 발은 도식화되었으며 귀갑 중앙에 장방형의 높다란 비좌를 설정하고 비좌 4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는데, 이처럼 귀부에 십이지신상을 조식한 것은 퍽 특이한 예에 속한다. 잘려진 이수에는 반룡(蟠龍)이 운기문(雲氣文) 속에서 앞발로 여의주를 잡고 있어서 통일신라 초기에 조성된 신라 태종무열왕릉비(新羅太宗武烈王陵碑) 이후 이수가 남아 있는 예가 없는 통일신라기 이수의 변천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
무장사미타전(鍪藏寺彌陀殿)-삼국유사(三國遺事)
앞 문 생략 - -
有彌陁古殿(유미타고전) : 절의 위쪽에 아미타(阿彌陀)의 고전(古殿)이 있다.
乃昭成大王之妃桂花王后(내소성대왕지비계화왕후) : 곧 소성대왕의 비(妃) 계화왕후(桂花王后)가
(一作聖(일작성) : (昭成大王; 혹은 昭으로 씀))
爲大王先逝(위대왕선서) : 대왕(大王)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中宮乃充充焉(중궁내충충언) : 왕후는 근심에 차서
皇皇焉(황황언) : 황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고
哀戚之至(애척지지) : 슬픔이 극도에 달하여
泣血棘心(읍혈극심) : 피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했다.
思所以幽贊明休(사소이유찬명휴) : 이에 그는 밝고 아름다운 일을 돕고
光啓玄福者(광계현복자) : 명복을 빌 것을 생각했다.
聞西方有大聖曰彌陀(문서방유대성왈미타) : 이때 서방(西方)에 아미타(阿彌陀)라는 대성(大聖)이 있어
至誠歸仰(지성귀앙) : 지성으로 신앙에 귀의하면
則善救來迎(칙선구래영) : 잘 구원하여 맞아 준다는 말을 듣고
是眞語者(시진어자) : "이것이 사실이라면
豈欺我哉(기기아재) : 어찌 나를 속이겠느냐."하고는
乃捨六衣之盛服(내사육의지성복) : 이에 육의(六衣)의 화려한 옷을 희사하고
罄九府之貯財(경구부지저재) : 구부(九府)에 저장해 두었던 재물을 다 내어
召彼名匠(소피명장) : 이름난 공인(工人)들을 불러서
敎造彌陁像一軀(교조미타상일구) :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 하나를 만들게 하고,
幷造神衆以安之(병조신중이안지) : 아울러 신중(神衆)도 만들어 모셨다.
중략 -
近古來殿則壞圯(근고래전칙괴이) : 그러나 근고(近古)에 와서 미타전(彌陀殿)은 허물어지고
而寺獨在(이사독재) : 절만 홀로 남아 있다.
諺傳太宗統三已後(언전태종통삼이후) :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종(太宗)이 삼국(三國)을 통일한 뒤에
藏兵鍪於谷中(장병무어곡중) :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因名之(인명지) : 그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 글에는 태종무열 이라 했지만 삼국통일은 문무왕때 이기에
문무왕을 착각하고 잘못적은 것이라 학자들은 풀이한다
'등산(남산 문화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남산 문화재답사(1) (0) | 2024.07.07 |
---|---|
서남산 문화재답사 2 (0) | 2024.07.07 |
서라벌 천년의 설(雪) (0) | 2024.07.07 |
천마총 설경(2014.2.12) (0) | 2024.07.07 |
경주남산 문화재 등반코스 (0) | 2024.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