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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왕 박태준 별세

죽전일지 2024. 9. 30. 12:03

박태준 - !

그의 폐에선 건설현장이나 광산에서 발생하는 석면으로 인한 섬유화 조직과 석회 물질이 발견됐다

국민들은 그 상처가 제철보국을 이끈 한 애국자의 위대한 상흔이라고 믿고싶다.

 

박 회장의 여동생은 "오빠는 가족한테도 '국가와 일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불렸다"며 "우리에게는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오빠였다"며 눈물을 훔쳤다.

대한민국 근대화를 이끈 주역 진정한 애국자 박태준 고인의 영정에 고개를 숙이고 애도한다

 

"선조의 피값(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짓는 제철소, 실패하면 영일만에 빠져 죽자"

박태준의 뜨거운 인생
일본서 어린 시절 - 와세다공대 들어갔다 귀국
6·25 참전해 죽을 고비… 전쟁 뒤 육군대학 수석 졸업
포항제철 건설 - "난 고속도로 감독할 거야 임자는 제철소를 맡아"
박정희 '종이마패' 건네

1971년 8월 일본 도쿄. 4월 시작한 포항제철소 공장 건립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자 일본 미쓰비시의 설비 담당자는 박태준 당시 사장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기일 내에 공사를 마칠 수 없다"며 설비 발주를 늦추자고 제안했다.

박태준은 굴하지 않았다. 포항으로 돌아온 그는 근로자들을 모아놓고 이같이 말했다. "이 제철소는 식민 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피값으로 짓는 것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을 해야 합니다.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박태준은 "하루 무조건 700㎥ 이상 콘크리트를 타설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군복 차림으로 하루 3시간씩만 눈을 붙이고 쉴 새 없이 현장을 독려했다. 박태준의 철강 신화는 이렇게 막이 올랐다. 그는 1970년 4월 공사를 시작한 지 3년 2개월 만인 1973년 6월 첫 쇳물을 뽑아냈고 25년 재임하는 동안 포스코를 조강 생산 2100만t급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다.

와세다 공대 입학… 6·25 참전

1927년 경남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에서 태어난 박태준은 1933년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와세다공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한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귀국했다. 이후 1948년 육사의 전신인 남조선경비사관학교 6기생으로 들어갔다. 6·25전쟁 때에는 포천 1연대의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당시 박태준은 생사기로의 순간을 맞았다. 1950년 6월 27일 박 회장은 서울 미아리 서라벌중학교 부근에서 중대장 10명 중 그를 포함해 단 두 명만 살아남아 부대원들과 전선을 지켰다. 소련제 탱크의 소음을 들으면서 최후 순간을 각오했지만 이때 육군본부로부터 '한강 이남에 집결하라'는 전문을 받고 후퇴했다.

전쟁이 끝난 뒤 박태준은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육사 교무처장으로 부임했다. 친척 어른 소개로 부인 장옥자씨를 만나 결혼한 것도 그 무렵이다. 이화여대 정외과를 졸업한 그녀는 신혼 휴가 뒤 서울로 떠나는 남편에게 첫 선물을 건넸다. 자기 은사인 최호준 교수의 '경제학 원론'. 그것이 박태준 인생에서 '경제'와 처음 만난 것이었다.

박정희 "자네가 제철소를 맡아"

1964년 박태준은 대한중석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을 받았다. 박정희는 이미 박태준을 대한중석에서 경영 능력을 시험해보고 종합제철소를 맡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해외 출장을 나갈 기회가 있으면 선진 제철소를 유심히 살펴보라"고 박태준에게 특별히 당부했다.

1965년 6월 청와대에서 박정희는 박태준을 불렀다. 박정희는 박태준으로부터 일본 철강업계에 대한 보고를 받은 뒤 "나는 고속도로를 직접 감독할 거야. 자네는 제철소를 맡아. 고속도로가 되고 제철소가 되면 공업국가의 꿈은 실현되는 거야. 자네의 능력과 뚝심을 믿네"라고 말했다.

대일 청구 자금으로 포스코 건설

박태준은 포항제철 건립에 착수했지만 문제는 1억달러에 이르는 자금이었다. 박태준은 1969년 1월 한국과 워싱턴을 오가며 세계 5개국 8개 회사의 연합(KISA)과 IBRD(국제부흥개발은행)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지만 퇴짜를 맞았다. 그는 귀국하던 길에 하와이에 잠시 들러 낙담한 채 하와이 해변을 걷다가 '대일 청구권 자금'을 활용해 제철소를 지어야겠다는 이른바 '하와이 구상'을 했다. 그는 국제전화로 박정희에게 자기 생각을 알리고 곧바로 일본 도쿄로 날아가 일본의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자금 지원 협상을 벌였다.

박정희 "임자한테 내가 졌어"

종합제철을 어떤 형태의 회사로 설립할 것인가도 문제였다. 박정희는 '특별법에 의한 국영기업체'로 하자고 주장했고, 박태준은 '상법상 주식회사'로 하자고 주장했다. 박태준은 대한중석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관료주의와 정부의 간섭이 국영기업체에 끼치는 폐해를 체험했기에 민간 기업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와대에서 세 차례나 토론이 있었다. 줄담배를 태운 박정희가 마침내 말했다. "임자한테 졌어. 좋은 방법을 강구해봐."

박정희는 이후 박태준에게 전권을 준다는 의미로 자신의 서명이 들어간 서류, 이른바 종이마패를 주기도 했다.
조형래 기자. 신은진 기자 ( 2011.12.14일 조선일보 )

92년 박정희 묘역 찾아 "25년 대업 완수" 보고
박정희와의 인연

박태준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정희)이다. 박 회장은 1948년 7월 28일 육군사관학교에서 박정희를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스승과 제자 사이었다. 박정희는 대위로 사관학교의 교관이었다. 탄도학을 가르치던 박정희가 수학을 잘하던 박태준을 눈여겨봤다. 박태준은 박정희를 처음 본 순간을 "싸늘한 새벽공기가 앞문으로 불어닥치는 느낌"이라고 회상했다.

5·16 쿠데타를 거행할 때 박태준은 혁명 참가자 명단에서 빠졌다. 박정희의 지시 때문이었다. 실패할 경우 살아남아 군을 이끌 지도자가 필요했고, 본인이 사형을 받게 되면 가족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5·16 이후 박태준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회 상공담당 최고위원으로 임명됐다. 박정희가 박태준의 능력을 경제방면으로 활용하겠다는 포석이었다.

박태준은 박정희의 3선 개헌 지지서명에 동참할 것을 요구받고도 거부했다. 박태준은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국장이 은밀히 포항으로 사람을 보내자 "제철소 하나만으로 바빠. 정치에는 끼지 않겠어"라고 단칼에 잘랐고 소식을 전해들은 박정희도 "그 친구 원래 그런 친구야"하고 받아넘겼다.

1992년 연간 2100만t 생산체제를 구축한 박태준은 기념식 다음 날인 10월 3일(개천절)에 국립묘지 박정희의 묘역을 찾았다. 이 자리에서 박태준은 한지에 붓글씨로 쓴 보고문을 낭독했다. "불초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를 드립니다. 혼령이라도 계신다면 불초 박태준이 결코 나태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25년 전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 잘사는 나라 건설을 위해 매진할 수 있도록 굳게 붙들어주시옵소서."
조형래 기자

 

 

이나야마(신일본제철 회장) "중국은 제철소 못해"… 덩샤오핑 "박태준 수입하지 뭐"

"한국에서 박태준을 수입하면 되겠군."

1978년 8월 중국 최고 실력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일본 기미쓰제철소에서 한 말이다. 제철소를 둘러본 덩샤오핑은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 이런 제철소를 지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덩샤오핑이 이유를 묻자, 이나야마 회장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이에 덩샤오핑이 농담처럼 '박태준 수입'을 얘기한 것. 그해 말 일본 도쿄에서 박태준 당시 포항제철 사장을 만난 이나야마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박 사장, 중국에 납치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해외에서 '박태준' 이름 석 자(字)는 '한국의 철강 기적'과 동의어였다. 일본 미쓰비시 종합연구소는 포스코의 성공 요인을 "모험사업을 추진하는 리더로서 지도력·통찰력·사명감을 충분히 발휘한 박태준 회장 덕분"이라고 분석했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은 1992년 '포항제철의 경영 성공 사례' 연구에서 박태준 회장의 탁월한 리더십을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1968년 IBRD(국제부흥개발은행)는 "한국의 외채 상환 능력과 산업구조를 볼 때 제철소 건설은 시기상조"라며 한국의 융자 신청을 거절했다. 당시 IBRD 실무 책임자였던 존 자페는 1986년 박태준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내 보고서는 틀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내 실수는 박태준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당신이 상식을 초월하는(beyond common sense) 일을 하는 바람에 내 보고서가 엉망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제철보국(製鐵報國)'을 신조로 삼았던 박 명예회장의 애국심에 대한 평가도 많았다.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은 "한국이 군대를 필요로 할 때 장교로 투신했고, 기업인을 찾았을 때 기업인이 됐으며, 미래 비전이 필요할 때 정치인이 됐다"며 "박태준에게는 한국에 봉사하는 것이 지상 명령이었다"고 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도 "박태준은 냉철한 판단력과 부동의 신념, 정의감으로 한·일 양국의 협력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박 명예회장을 "경영에 관한 한 불패의 명장"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박태준 회장은 군인의 기(氣)와 기업인의 혼(魂)을 가진 사람"이라며 "후세의 경영자들을 위한 살아있는 교본"이라고 칭찬했다.
진중언 기자

 

 

박태준 정신 "난 社長 아닌 소대장… 전쟁터엔 인격 없다"

[군인 정신과 기업가의 魂]
소대장論 - 80% 공정 완료된 구조물, 콘크리트 10㎝ 미달로 폭파
오케스트라論 - 손에는 늘 軍 지휘봉… 수천명 종업원 하모니 조율
목욕論 - 깨끗한 몸에서 깨끗한 鐵 나와… 제철소 목욕탕, 특급호텔 수준

"창업 이래 지금까지 제철보국(製鐵報國)이라는 생각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 철은 산업의 쌀이다. 쌀이 생명과 성장의 근원이듯 철은 모든 산업의 기초 소재다."(1978년 직원을 대상으로 한 박태준 명예회장의 특강)

박 회장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냈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좌우명으로 살았던 그는 군인정신과 기업가의 혼(魂)을 함께 가진 철강왕이었다.

군인정신이 바탕이 된 완벽주의자

1977년 8월 1일 발전 설비 공사 현장을 돌아보던 박 회장은 콘크리트가 10cm 정도 덜 쳐진 곳을 발견했다. 이튿날 건설 현장의 책임자, 외국인 기술 감독자, 임직원을 모두 한자리에 모았다. 이 자리에서 박 회장은 80%의 공정이 진행된 구조물을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이 사건으로 손실은 봤지만 '포철(현 포스코) 사전에 부실공사는 없다'는 무형의 자산으로 남았다. 또 하버드대 등의 경영학 교재에 모범 경영 관리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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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회장은 현장에서 늘 "나는 사장이 아니라 전쟁터 소대장이다. 전쟁터 소대장에겐 인격이 없다"고 말했다. 1970년대 한국 건설업 수준에서 지휘자가 고매한 인격에 매달린다면 자신의 인격은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국가 대업을 망칠 것이라는 얘기다.

1971년 4월 포스코의 사보 '쇳물'을 창간할 때 박 회장은 육필로 휘호를 썼다. '무엇이든 첫째가 됩시다.'

박 회장 손에는 늘 군 지휘봉이 들려 있었다. 지휘자의 지휘로 악기가 혼연일체가 될 때 아름다운 곡이 나오는 것처럼 박 회장은 포스코 경영을 오케스트라 지휘자에 비유했다. 그는 "모든 기계가 고유 기능을 가진 것처럼 수천 명의 종업원 개개인은 특성이 있다"며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 기계를 효과적으로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가난 없애려 철에 목숨 건 기업가

박 회장이 '공장 관리 원칙 1호'라고 강조했던 것이 바로 '목욕론(沐浴論)'이다. 그는 "목욕을 잘해 깨끗한 몸을 유지하는 사람은 정리정돈하는 습성이 생겨 안전의식이 높아지고, 제품 관리도 잘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직원 기숙사를 찾을 때면 늘 목욕탕을 먼저 가볼 정도로 목욕을 강조했다. 1985~1987년 제철소 내 목욕탕·화장실 개·보수 때는 50억원을 들여 서울 특급 호텔 수준으로 바꿔 놓기도 했다.

1970년 가을 박 회장은 보험회사로부터 6000만원의 거금을 리베이트로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으로 내밀었지만 박 대통령은 알아서 쓰라고 했다. 박 회장은 이 돈으로 장학재단을 세웠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박 회장은 "공화당에 정치자금을 대는 일본업체 물건을 쓰라"는 당시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의 요구를 다섯 차례나 거절했다. 당시 공화당 의원들은 뻣뻣한 박 회장에게 '소통령'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비아냥거렸지만 그는 오히려 이를 훈장으로 여겼다. 정치권으로부터 견제를 받던 박 회장은 1974년 가을 가택 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정보기관이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장롱 속에는 이불과 옷, 금고 속에는 집 문서와 패물 몇 가지가 전부였다.

포스텍을 세운 박 회장은 교수직 인사 청탁에 시달렸다. 박 회장은 아무런 말없이 이력서를 당시 김호길 총장에게 넘겼지만 곧 반려됐다. 기분이 좋아진 박 회장은 이후로 인사 청탁을 받으면 "우리 총장은 내 말도 안 듣는 사람이오. 학교로 이력서를 보내세요"라고 말했다.
전수용 기자

 

대한민국 근대화를 이끈 주역인 고인의 영정에 고개를 숙이고 애도한다. 박 회장의 여동생은 "오빠는 가족한테도 '국가와 일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불렸다"며 "우리에게는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오빠였다"며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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