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족

이천 서(利川 徐)씨의 유래

죽전일지 2024. 9. 29. 18:26

이천서씨의 유래

◎기자(箕子)의 42대손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쫒겨 이천서하성(利川徐河城)에 피해와서 살았으므로 그 뒤에 이로 인하여 성(姓)을 서씨(徐氏)로 하였다한다,

또는 전해오기를 여수기(余守己)라는 분이 단군(檀君)을 더불어 예국(滅國))의 추장(酋長) 되어 있으면서 아홉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이 여러 고을의 장(長)으로 나누어져 있을 때 중민(衆民)을 도와서 공(功)이 많았으므로 「여」자 (余字)에 두인변(.....두 사람 즉 사람이라는 뜻)을 부쳐서 서(徐)로 하여 성(姓)으로 내리셨다 고도 한다,

자료출처: 이천서씨 공도공파 2005년 癸酉譜(계유보)


◎기자의 42세손이며 고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애왕(哀王) 기준(箕準)이 위만에 쫏겨 지금의 이천인 서아성(徐阿城)에 피신하여 살게 되고 지명을 따서 서씨가 되었다고 한다.[魏志 東史綱目]

◎기준(箕準)의 후손인 만주(萬周)라는 사람이 나이 40살되던 어느날 사슴의 목숨을 구해주자, 신라 문성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기특하게 여겨 만주에게 서씨 성을 내려 뒤를 보살펴 주고 신(神)의 가호로 안일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이름을 신일(神逸)로 고쳤다고 한다. [徐氏史蹟精解] 

 

◎ 단군시대(檀君時代) 예국(穢國) 군장(君長) 여수기(余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 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 을 표한다" 하여 중인변(衆人邊)을 부쳐 여(余)자를 서(徐)라고 고쳐 사성(賜姓)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서신일은 이천 서씨의 시조이며 이천 서씨에서 달성(達成), 장성(長城), 연산(連 山), 평당(平當), 남평(南平), 남양(南陽) 등 7파의 서씨가 나뉘었고, 달성 서씨에서 다시 대구 서씨로 나뉘었다 한다.

 

達城徐氏(달성서씨)는 利川徐氏(이천서씨)에서 分貫(분관)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내력을 명확하게 고증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천서씨 문헌에 徐熙(서희)의 아들 4형제 중 徐周行(서주행)이 달성으로 移居(이거)하였다는 설이 있을 뿐이니 막연하기 한이 없다

 

이천서씨에서 분관된 달성서씨는 고려 軍器少尹(군기소윤) 徐閑(서한)을 시조로 하는 京派(경파)와 고려 版圖判書(판도판서) 徐晋(서진)을 시조로 하는 鄕派(향파)로 나누어졌는데 조선 肅宗(숙종) 28(서기1702)년에 처음으로 족보를 함께 하여 壬午譜(임오보)를 만들었으나 두 파의 의견충돌이 심하여 결국 英祖(영조)대에 이르러 서기1736년 京派(경파)만이 단독족보를 만들어 大邱徐氏(대구서씨)로 갈라섬으로써 양파가 완전히 족보를 달리하게 되었다


 

☆ 姓氏制度(성씨제도)는 원래 王家(왕가)에서만 사용하다가 차츰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퍼진 것으로서, 우리 나라는 古朝鮮(고조선) 시대에 왕족에 한하여 성씨를 사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이후 三國時代(삼국시대) 고구려의 주몽이 高氏(고씨) 백제의 온조가 扶餘氏(부여씨) 신라의 혁거세가 朴氏(박씨)를 성씨로 사용했다는 기록을 전한다
우리 나라 성씨 가운데 箕子(기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는 서씨 이외에도 淸州韓氏(청주한씨)와 太原鮮于氏(태원선우씨) 및 幸州奇氏(행주기씨) 등이 있다.
서씨로서 이름을 떨친 이는 新羅(신라) 때의 개국공신 阿城大將軍(아성대장군) 徐豆羅(서두라)가 있었다

 

서씨의 都始祖(도시조)는 신라 말기에 阿干(아간)을 지낸 徐神逸(서신일)이다
徐氏史蹟精解(서씨사적정해)에 따르면 箕準(기준)의 후손인 萬周(만주)라는 사람이 나이 40살에 사슴의 목숨을 구해준 어느 날 신라 文聖王(문성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기특하게 느껴 왕의 눈에 들어 만주에게 徐氏(서씨)의 성을 내리고 뒤를 보살펴 줌으로 神(신)의 가호로 안일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이름을 徐神逸(서신일)로 고쳤다고 한다
오늘날 이천 徐氏(서씨)는 모두 그의 후손이며 達城(달성) 連山(연산) 平當(평당) 南平(남평) 南陽(남양) 등 7개 파의 서씨가 나뉘었고, 모두 徐神逸(서신일)의 후손이라고 한다

 

徐神逸(서신일)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그의 처음 조상인 서두라는 아성 대장군으로 있었고 서신일 대에 이르러 산촌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사슴 한 마리가 화살을 맞은 채 사냥꾼에게 쫓겨 집안으로 뛰어 들어오므로 불쌍히 여겨 화살을 빼주고 먹이를 주며 극진히 간호해 준 다음 다시 산으로 놓아주었다


그날 밤 꿈에 한 백발의 신령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오늘 그대에 집에 왔던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사냥꾼의 화살을 맞아 죽게 되었는데 다행이 그대의 은덕으로 살게 되었으니 그대의 자손이 世世(세세)로 宰相(재상)을 지내리라”고 했다
나이 80이 되도록 슬하에 혈육이 없던 그는 그날부터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貞敏公(정민공) 徐弼(서필) 이요 필의 아들이 유명한 徐熙(서희) 선생이다

 

한편 고려 초기에 徐穆(서목)이 있었는데 고려 태조 王建(왕건)이 남정(南征)할 때 태조를 받들어 인도하여 漢川(한천)에 이르러 大川(대천) 큰 냇물을 잘 건너게 했다는 공로로 利川伯(이천백)의 封爵(봉작)을 받았다는 기록이 님아있다

 達城徐氏(달성서씨)는 利川徐氏(이천서씨)에서 分貫(분관)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내력을 명확하게 고증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천서씨 문헌에 徐熙(서희)의 아들 4형제 중 徐周行(서주행)이 달성으로 移居(이거)하였다는 설이 있을 뿐이니 막연하기 한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