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경환이와 함께 할 시간을 마련하였다.
지구에서 가장 큰 나라이면서 한국과 역사적으로 얽혀있는 나라 -
중국 - ! 중국의 수도에 있는 자금성과 만리장성등 유적들을 돌아보며 그들을 가늠해 본다.
베이징(北京,북경)은 약 700년간 중국 수도의 자리를 지켜온 도시로
중국 7대 고도 ( 북경, 서안, 낙양, 남경, 사천, 항주, 개봉)중의 하나.
중국의 화북평야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남쪽으로는 발해만과 인접하고 있다.
일찍이 화북(華北) 대평원과 북방의 산간지대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 역사상에 등장하였던 북경은,
1160년대 몽골족이 남하하여 중도성(中都城 북경 옛 지명)을 빼앗은 뒤 쿠빌라이(世祖) 때에 신성(新城)을
건설하고 국도로 정하여 대도(大都)라고 명명하였다.
몽골족이 중국을 통일하여 원(元)나라를 세우자 대도는 중국 전역을 지배하는 정치중심지가 되었고, 마르코 폴로는 칸발릭(Khanbalik)이라는 도시명으로 그 호화로운 번영상을 기록하고 있다. 명대(明代)에는 처음 국도를 지금의 난징[南京]에 두었다가 1420년에 영락제(永樂帝)가 이곳을 국도로 정하고 북경(北京)이라 하였는데, 베이징이라는 명칭은 이때에 비롯되었다.
명대에는 남문(南門) 밖에 외성(外城)을 구축하고 북부의 성역(城域)을 대도 때보다 축소하여 내성(內城)이라 불렀는데, 그 내·외성이 지금의 베이징성의 규모를 이루고 있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淸)나라도 1644년 이후 멸망에 이르기까지 이곳을 국도로 하였는데, 만주족과 한족의 거주지역을 구분하여 내성에 만주족, 외성에 한족을 살게 하였다.
중화민국(中華民國) 시대에도 계속 이곳을 국도로 삼았으나 북벌(北伐) 완성 뒤 난징으로 천도하여, 이곳을 베이핑[北平]으로 개칭하였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다시 그 수도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북경의 어느 공연장 안 인데 이놈들은 넓은 땅덩어리 마냥
무엇이던 크다. 조형 항아리 조차 엄청크네 -
천안문 (天安門), 자금성의 정문(紫禁城, 쯔진청)
세계 최대의 광장 - 천안문(티엔안먼) 광장
동서 500M/ 남북 800M로 백만명은 모일수 있다는 세계최대의 광장 천안문.
우리에겐 1989년 민주화를 외쳤던 중국인들의 광장으로 기억되는 곳.
천안문 광장과 자금성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는데..
과거 베이징의 역사가 깃들여 있는 곳이다.
父子 之間이다 ( 고로 난 부자 )
인민 대회당 ( 천안문 광장과 함께 하고 있다)
북경 올림픽 이전에 내가 다녀갔는데 그때와 크게 다른점은
딱 두가지, 자가용 차량이 엄청 많아졌다, 즉 국민경제가
좋아 졌다는것이다. 관광객이 대다수 한국인이었는데 반해
지금은 거의가 중국 자국민이 라는것이다.
인기 있었던 한국돈 "천원" "천원" 왜치던 상인들 지금은 별로다
북경의 자금성은 명나라 영락제 18년
(서기 1420년) 완공되었으며 238만 평방미터, 건축물은 9,999 칸의 웅장하고 거대한 규모였다.
기둥에 쓰일 나무는 사천지방에서 조달된 것으로 운송에만 4년이 걸렸다고 하네요.
전각의 받침대와 부조에 쓰인 돌은 50km 떨어진 채석장에서 날랐어요.
돌은 하나의 무게가 200톤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부역자들은 겨울철 길에 물을 뿌려 빙판을 만든 뒤 돌들을 날랐다고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자금성에는 황제 일가를 위해서
9천 명의 시녀와 1천명의 내시도 함께 살았다고 하네요.
자금성은 명, 청 때 500여년 간 24명의 황제가 살았던 궁전입니다.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는 권좌에 오른 지 4년 째 되던 1406년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고 만리장성 이후 중국 최대의 역사라
불리는 자금성 쌓기에 나서게 된것이죠.
자금성은 철통 같은 보안으로 황제를 지켰다고 해요.
바닥에는 걸을 때 경쾌한 발소리를 내는 특별한 벽돌이 깔려 있습니다.
이 벽돌의 효과는 음향만은 아니었다고 해요.
땅 밑에서 뚫고 올라올지 모를 침입자를 막기 위해 40여 장의 벽돌을 겹쳐 쌓았다고 합니다.
자금성 내에는 후원을 제외하고는 나무가 전혀 없습니다.
암살자가 나무에 숨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데요.
천자의 거처지만 어쩌면 금으로 둘러싸인 감옥이었는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자금성은 1949년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뒤에야
비로소 일반인에게 공개가 되었습니다.
명나라 황제들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에 이르기까지 권력의 최상층이 거주한
궁성이며 궁궐인 곳이다. 푸이는 세 살때 황제로 일곱 살에 퇴위, 열 아홉에 자금성에서
축출되어 만주국 총통에서 황제로 1945년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의 포로수용소에서 5년
간 억류, 중국에 송환된 후 9년간 수용소에서 사상개조를 받았으며, 1959년 보통사람
이 되었다가 1967년 암으로 사망했다.
과거의 궁전이라는 뜻에서 공식 명칭은'고궁'이 되었습니다.
왕조는 사라졌지만 해마다 600~8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자금성은 여전히 중국문화의 중심으로
위용을 떨치고 있습니다.
인력거 투어
베이징 관광으로 빠지지않는 중국 옛주택 골목길 즉 후통(胡同)체험도 해 볼만하다
무려 800여년간 사람들이 살아온 중국 고택지역 골목으로 큰 부자 동네란다
영화배우 이연걸도 모친을 위해 여기에 집을 한채 사드렸단다.
까끔 열린 대문 안으로 보이는 내실은 답답해 보인다.
여기는 북경 왕부정(王府井) 거리
중국의 명동이라 불리는 왕부정거리는 옛날 궁궐(자금성)에서 사용하던 우물이 있던 곳이며 아직도 우물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북경의 화려한 중심 상가 거리였다.
서울의 명동거리와 같다는 “왕부정(왕푸징)거리”에는
먹자골먹이 유명하다. 중국인들은 하늘에 비행기와 육지를
달리는 기차와 바다의 잠수함을 빼고는 무엇이든지 다 먹는 다는가이드의 안내를 듣고
우리일행들은 호기심으로 반신반의하면서 먹거리 탐방에 나셨다.
중국 각종 음식들을 북경거리 한족으로 200~300여 미터 길거리 포장 마차식으로 배열해 놓고 각국의
여행객들과 중국의 젊은이들을 끌어들는 곳이었다.
이곳은 한국에서 먹어보기 힘든 전갈, 메뚜기, 개구리, 뱀, 불가사리, 지네, 열대과일 등 이색적인 간식거리를 맛 볼 수 있을뿐만 아니라 다양한 식습간이 있다는 왕부정 먹자골목이였다.
다양한 상점과 백화점 특히, 롯데백화점이 입점하여 있는 곳이기도 했다.
개구리 뒷다리, 양고기고치, 순두부 , 야자수 등 무수한 요리들이 진열대위에 진열 되어있다.
사람들이 워낙 많아 떠밀리어 흥정과 시식은 고사하고 구경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이 많은 인파로 분볐다
이 왕부정 거리는 고대건축물과 현대가 어우러져있는
중국 최대 번화가 이지만 올림픽 개발 이후 북경 주변 신도시에
밀리는 형편이다.
우리가 3박4일간 숙식할 호텔 "롱 펠리스"
안개가 자욱하여 화면이 어둡다
만리장성 (만리장성)
만리장성은 북방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북방 흉노족이 바로 사실은 고구려의 전신인 해모수단군이 세운 북부여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조선의 삼한중 천자국인 진조선이 멸망하고 귀족들에 의해 공화정치로 맥을 이으던 진조선을
해모수가 군사를 일으켜 진조선을 차지하고 공화정치를 폐지하고 국호를 북부여로 짓습니다.
진나라는 그런 북부여를 두려워했습니다.
하여, 시황제는 다른 어떤 나라들 보다 북부여를 두려워 하여 만리장성을 쌓게 한 것입니다.
만리장성은 보하이 만[渤海灣]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약 6,400km(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다. 현존하는 만리장성은 명대 특히 그 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동쪽은 보하이 만 연안의 산하이관[山海關]부터 중국 본토 북변을 서쪽으로 향하여 베이징[北京]과 다퉁[大同]의 북방을 경유하고, 남쪽으로 흐르는 황허 강[黃河]을 건너며, 산시 성[陝西省]의 북단을 남서로 뚫고 나와 다시 황허 강을 건너고, 실크로드 전구간의 북측을 북서쪽으로 뻗어 자위관[嘉?關]에 다다른다. 지도상 총연장은 약 2,700km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이다
만리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만리장성이라는 말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전국시대이다. 전국시대의 장성은 북방에만 한정되지 않았고, 중원에 나라를 세운 제(齊)·중산(中山)·초(楚)·연(燕)·조(趙)·위(魏)·진(秦) 등의 여러 나라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성을 구축했다. 조·연·진 3국이 쌓은 북변의 성벽은 문헌에도 기재되어 있으며, 최근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의 츠펑[赤峰] 부근에서 유적이 발견되었다.
BC 221년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始皇帝)가 연과 조가 축성한 북변의 장성을 연결하여 서쪽으로 더 연장시켰는데 이는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리장성에 얽힌 재미있는 구전
흔히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은 '만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어원은 전혀 다른 뜻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中國(중국)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계획을 세우고 기술자와 인부들을 모은 후에 대 역사를 시작했을 때이죠.
어느 젊은 남녀가 결혼하여 신혼생활 한달 여 만에 남편이 만리장성을 쌓는 부역장에 징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일단 징용이 되면 그 성 쌓는 일이 언제 끝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죠.
안부 정도는 인편을 통해서 알 수야 있었겠지만, 부역장에 한 번 들어가면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 신혼부부는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며, 아름다운 부인은 아직 아이도 없는 터이라 혼자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을 부역장에 보낸 여인이 외롭게 살고있는 외딴 집에 어느날 지나가던 나그네가 찾아 들었었죠.
남편의 나이 쯤 되어 보이는 사내 한사람이 싸릿문을 들어서며 "갈 길은 먼데 날은 이미 저물었고 이 근처에
인가라고는 이 집밖에 없습니다. 헛간이라도 좋으니 하룻밤만 묵어가게 해 주십시오"하고 정중하게 간청을 했죠.
여인네가 혼자 살기 때문에 과객을 받을 수가 없다고 거절할 수가 없었던 이유는 주변에는 산세가 험하고
인가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여인에게 사내가 말을 걸었죠.
"보아하니 이 외딴집에 혼자 살고 있는듯 한데 사연이 있나요?" 라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숨길 것도 없고 해서 남편이 부역가게 된 그 동안의 사연을 말해 주었죠.
밤이 깊어가자 사내는 노골적인 수작을 걸었고,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여인과 실랑이가 거듭되자 더욱 안달이 났었죠.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그대가 돌아올 수도 없는 남편을 생각해서 정조를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직 우리는 너무 젊지 않습니까?
내가 당신의 평생을 책임질 테니 나와 함께 멀리 도망가서 행복하게 같이 삽시다."
사내는 별별 수단으로 여인을 꼬드기 시작 했었죠
하지만 여인은 냉랭 했습니다.
사내는 그랄수록 열이나서 저돌적으로 달려 들었고, 여인의 판단은 깊은 야밤에 인적이 없는
이 외딴 집에서 자기 혼자서 절개를 지키겠다고 저항한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여인은 일단 사내의 뜻을 받아들여 몸을 허락하겠다고 말한 뒤, 한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조건을 걸었었죠.
귀가 번쩍 뜨인 사내는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줄 테니 말해 보라고 했고.
여인은 "남편에게는 결혼식을 올리고 잠시라도 함께 산 부부간의 의리가 있으니
그냥 당신을 따라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새로 지은 남편의 옷을 한 벌 싸 드릴 테니 날이 밝는대로 제 남편을 찾아가서 갈아 입을 수 있도록 전해 주시고
그 증표로 글 한 장만 받아 달라는 부탁입니다
어차피 살아서 만나기 힘든 남편에게 수의를 마련해주는 기분으로 옷이라도 한 벌 지어 입히고 나면 당신을 따라 나선다고 해도
마음이 좀 홀가분해질 것 같습니다.
당신이 제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 오시면 저는 평생을 당신을 의지하고 살 것입니다.
그 약속을 먼저 해 주신다면 제 몸을 허락하겠습니다."
여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마음씨 또한 가상 한지라 좋은 여인을 얻게 되었노라 쾌재 부리며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이게 웬 떡이냐''''
하는 심정으로 덤벼들어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욕정을 채운 후 골아 떨어졌죠.
사내는 아침이 되어 흔드는 기척에 단잠을 깨었죠.
밝은 아침에 보니 젊고 절세의 미모에다 고운 얼굴에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니 양귀비와 같이 천하 미색이었죠 .
사내는 저런 미인과 평생을 같이 살 수 있다는 황홀감에 빠져서 간밤의 피로도 잊고 벌떡 일어나서
어제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길 떠날 차비를 했고. 여인은 사내가 보는 앞에서 장롱 속의 새 옷 한 벌을 꺼내
보자기에 싸더니 괴나리 봇짐에 챙겨 주는 것이 었습니다.
사내 마음은 이제 잠시라도 떨어지기 싫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심부름을 마치고 와서
평생을 해로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걸었었죠.
드디어 부역장에 도착하여 감독관에게 면회를 신청하면서.
옷을 갈아 입히고 글 한 장을 받아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감독관이 "옷을 갈아 입히려면
공사장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한 사람이 작업장을 나오면 그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어야 하는 규정 때문에
옷을 갈아 입을 동안 당신이 잠시 교대를 해 줘야 가능하다" 고 말하자. 사내는 그렇게 하겠노라 하고
여인의 남편을 만난 사내는 관리가 시킨대로 대신 들어가고 그에게 옷 보따리를 건네주었죠.
남편이 옷을 갈아 입으려고 보자기를 펼치자 옷 속에서 편지가 떨어졌습니다.
"당신의 아내 해옥입니다.
당신을 공사장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이 옷을 전한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이런 연유로 외간 남자와 하룻밤 같이 자게 된 것을 두고 평생 허물하지 않겠다 각오가 서시면 이 옷을 갈아 입는 즉시
제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시고 혹시라도 그럴 마음이 없거나 허물을 탓하려거든
그 남자와 교대해서 공사장 안으로 다시 들어가십시오."
자신을 부역장에서 빼내 주기 위해서 다른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다고 고백을 듣지만
그것을 용서하고 아내와 오손도손 사는 것이 낫지,어느 바보가 평생 못나올지도 모르는 만리장성
공사장에 다시 들어가서 교대를 해주겠는가?
남편은 옷을 갈아 입고 그 길로 아내에게 달려와서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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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야 말로 하룻밤 자고 평생 만리장성을 쌓아야 하는 것이 아니가..
실로 하룻밤 미인하고 잠자리의 댓가로는 엄청난 희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미인을 쟁취 하고자 하는 욕심은 있는 것이 숫컷의 욕망이 아니겠습니까??
많은 인간사에서 이처럼 다른 사람이 나 대신 만리장성을 쌓아준다면 다행한 일이겠지만 어리석은 그 사내처럼 잠시의 영욕에 눈이 어두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의 만리장성을 영원히 쌓아주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룽칭샤 龍慶峽(용경협)
위치: 북경에서 85㎞ 정도 떨어져있음(자동차로 베이징에서 1시간 정도 소요)
전체 면적: 119㎢
총길이: 21㎞
댐 높이: 70m
물 깊이: 450m
과연 청국넘은 대단하다. 이것을 댐으로 막아 돈벌이를 생각했을까 - - -
1973년에 계곡을 막아 댐을 건설하면서 생긴 인공 호수(저수지)로, 중국과 홍콩이 합작으로 건설하였다.
1996년 댐 위에까지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생기면서 베이징의 16명소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7㎞를 운행하는 유람선이 특히 유명한데, 유람선을 타고 주위 절경을 감상하는 데 총 8시간 정도 걸린다.
협곡의 좌우로 기기묘묘한 봉우리들이 잇따라 펼쳐져 장관을 이루는 까닭에 일명 '작은 계림(小桂林)',
작은 싼샤(小三峽)로 불린다.
봉우리들은 생긴 모양에 따라 이름이 다르며 강택민이 썼다는 '용경협'이라는 붉은글씨가 새겨진
절벽도 있다. 양쪽 벼랑은 2300m로 깍아지를 듯하여 그 기세가 매우 장관이다.
용경협은 협곡형 저수지로 물 깊이가 450m이다.
댐과 인공폭포도 볼 만하고, 해마다 겨울에는 환상적인 얼음 축제인 빙등예술절(氷燈藝術節)이 열린다.
중국 남방 산수의 부드러움과 북방 산수의 웅장함을 두루 갖춘 지역으로 통한다.
두번째 와 보지만 과연 신선이 사는곳처럼
말로 표현못할 아름다움이다 -
유람선을 타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강 양쪽에 높고 가파른 절벽들이 연이어져 신비한 느낌이 든다. 각 봉우리들은 생긴 모양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신이 연필을 꽂아 놓은 모양이라는 뜻의 신필봉(神筆峰), 절에서 쓰는 종을 엎어 놓은 모양의 종산, 관리들이 쓰는 모자를 엎어 놓은 모양의 봉관…. 사람 옆얼굴을 연상케 하는 봉우리도 있다. ‘용경협’이라고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 절벽도 있는데, 이는 특별히 강택민의 필체라고 하여 전기를 끌어들여 조명장치까지 해놓고 있다.
이건 틀림없는 문필봉 이제 - ?
20분 정도 주위의 경관에 정신없이 넋을 잃고 있노라면 갑자기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하늘을 쳐다본다. 높이 1백80m쯤 되는 강 위에 외줄이 걸려 있고 그 위에서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탄 사람이 나타나 외줄타기 서커스 묘기로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절벽 위로는 구연동, 금강산, 신선원 등의 등산코스도 있다. 龍慶峽은 북경으로부터 85㎞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八達嶺에서는 20㎞ 떨어진 곳에 있다. 관광지로서 최근에 많이 찾고 있다. 수년전에는 전혀 중국인들은 이러한 곳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중국 정부에서 관광에 투자를 많이 하여 개발을 많이 하고 있다. 현재는 중국의 북경 사람들도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
용경협 안에 있는 백화동
백가지 꽃이 있다고 하지만 조화들 - - - -
여기는 천단공원
명청대의 황제가 하늘, 땅, 해 , 달에게 일년에 3번씩 제사를 지냈다.
위치는 자금성 남쪽에 있다
황제가 오곡풍양을 기원했던 제단으로 중국 최대의 단묘 건축물로 명나라
영락제가 1420년에 자금성과 함께 건축하였다.
주요건물로는 기년전 황궁우 원구단을 들수있지요~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중국의 중요 보호문화재이다.
기년전(祈年殿)
중국에서 군주 제천 행사를 맞기 위해 지은 제단 중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의 하나로서 천안문, 자금성과 함께 베이징의 심벌이다. 기년전은 직경 32m,높이 38m,25개의 중심에 유지된 제단으로 현존한 중국 최대의 제단.중국 건축 사상 중요한 건축물로 간주 된다.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에 황제가 오곡풍작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목조에다가 금도금을 입혔으며, 삼층으로 유리기와를 올려 지붕을 만들었다. 명나라 시대에는 위에는 청색과 황녹색으로 되어 있었지만, 건륭제가 1751년에 중건을 하면서 전부 청색으로 바꾸었다. 1889년 낙뢰에 의하고 한번 소실되었지만,1906년에 다시 재건되었다.
기년전은 천단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기곡전이라고도 하며, 구조 형식은 위는 집이고 아래는 단이며 3층 처마는 층층이 작아지면서 우산 형태를 이루었다. 6m 높이의 둥근 한백옥석대 위에 우뚝솟아 있는데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 기세가 비범하고 웅장 화려하다. 이 기년전을 받치고 있는 것이 바로 기곡단(祈穀壇)인데,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단은 직경 68.2m, 중단은 79.6m, 하단은 90.8m이다.
기년전의 중심이 되는 4개의 기둥은 춘하추동 4계절을 상징하며 직경이 1.2m, 높이는 19.2m에 달한다. 둘레의 길이가 보통 사람의 두 아름을 넘는다. 그 주위에 각각 12개의 기둥이 두 줄로 둘러싸고 있는데 안쪽의 12 기둥은 즉 중간층의 12대 붉은 기둥에 의해 분할된 공간은 1년 12달 '월'을 상징하고, 외층의 12개 처마기둥은 하루의 12개 시간(12時을 상징하며,보정 아래의 뇌공주는 황제의 "천하통일"을 상징한다. 천장에는 용이 그려져 있다. 기둥에 사용된 목재는 전부 운남성(雲南省)에서 운반해 온 것이다. 기년전은 "경천예신(敬天禮神)"의 사상으로 설계, 전내의 기둥은 모두 특정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자금성의 기와가 황제의 색깔인 황금색인데 비하여
천단의 기와가 청색인 것은 황제가 하늘에 대한 겸손을 의미한다.
황궁우(皇穹宇) : 멀리 황궁우 지붕이 보인다
원구단의 북쪽으로 황궁우가 있다. 제천 시 사용하는 신패 등은 모두 이곳에 보관 되었다. 명나라 가정제 9년인 1530년에 짓기 시작했다.
전문 신주를 모셔놓는 사당으로서 속칭 침궁이라고 한다. 높이 19.5m, 밑부분의 직경 15.6m미터, 목조구조이며, 지붕은 8개 기둥에 의해 지탱되고 대들보가 없이 두공을 쌓아올렸으며, 천정판이 층층이 축소되어 아름다운 궁륭식 천정을 형성하였다. 기년전을 축소해 놓은 듯한 아담한 건물이다.
황궁우는 같은 시기에 지어진 다른 건물과는 다른, 독특한 품격이 있는 건물이다. 예술성 높은 건축물이며 내부의 장식도 화려해 일반인은 물론 전문가나 학자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원구단(圓丘壇)
황제가 하늘에 제를 올리기 위한 의식을 거행한 장소이다.명나라 가정(嘉靖) 9년인 1530년에 만들어졌으며, 건륭 14년, 1749년에 층축되었다. 매년 동지에 풍작을 감사하는 의식을 행하고, 가뭄이 든 해에는 기우제를 지냈다.
형태는 중국의 우주관인 천원지방(天圓地方)에 따라 원형이다.또 난간 계단 등이 음양 사상을 따라 지어졌으며 각 단의 직경을 합계한다면 45장이고, 이것은 단지 9의 배수라고 한 의미뿐만 아니라,구오지존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회음벽(回音壁)
황궁우의 담으로 원형이며, 둘레가 193.2m, 높이가 0.9m, 두께 0.9m이다. 이는 벽돌을 다듬어 가며 빈틈없이 이어 쌓은 담으로 두 사람이 벽 안쪽에 각각 동서 벽밑에 서서 벽에 얼굴을 북쪽으로 두고 벽을 향해 대고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면, 마치 전화로 통화하는 것처럼 음파가 담벽을 따라 계속반사 전진하며 서로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다.
어째서 이런 신기한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회음벽은 원형이고 벽돌을 가지런히 이어 붙였으며, 벽면이 매우 매끄럽다. 게다가 벽 위에는 기와를 얹은 처마가 있어서 소리가 분산되어 소실되는 것을 막아 주므로 소리가 둥근 벽을 타고 반사되어 전달되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이것이 음향학의 원리를 건축에 응용한 것이라고 자랑하는데, 그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우연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발상과 착상과 해석이 재미있다.
기년전 황궁우 원구등 중요한 건물이 북에서 남으로 일직선으로 서있다.
중국인들의 붓글씨 취미
이화원이나 천단공원에서 보면 현역에서 은퇴한 노인들이 취미 생활로 아침부터 공원에 나와 자신의 장기인 붓글씨를 쓰면서 여가생활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긴 막대에 큰 붓을 달아 흐르는 물을 찍어 바닦에 쓰는데, 일필 휘지를 흩날리는 솜씨가 정말 멋있고 부럽다.
우리에겐 너무나 신기했지만 그들은 그차체가 하나의 생활이다
우와 - ! 이 할머니는 초서(草書)를 - - - -
북경오리(北京 烤鴨, 베이징카오야, Beijing Duck)는 특수하게 사육된 오리를 아궁이에 넣어 껍질이 노릇노릇해질 때까지 잘 구운 오리고기를 껍질과 살코기를 썰어내, 만두피처럼 얇은 병에 오리고기와 대파 썬 것에 장을 찍어 싸서 먹는 중국의 대표적인 요리다. 파삭파삭하고 고소한 맛이 나는 껍질부분이 가장 맛있는 부위이며, 고기를 썬 후 뼈 부분은 다시 구워주는데 손으로 집어 뜯어 먹으면 된다.
북경의 야경 으로 자랑꺼리라고 안내 하는곳
세계에서 3번째로 큰 TV가 설치되어진 더 플레이스(길이가 250m)
이 백화점 역시 2008베이징 올림픽 직전에 세워졌다
서태후의 휴양지 이화원 (?和園)
.지춘정(知春亭) :이화원의 곤명호 옆 호수 안으로 들어가 있는 아름다운 정자다.
사방에 버드나무 가지가 드리워져 있는데 봄이 오면 춘색이 완연하여 이름 그대로 지춘정(봄이 왔음을 안다는 뜻)임을 느낄 수 있다.
이곳에 서면 27도로 곤명호와 만수산을 볼 수 있는데 앞에는 탁 트인 곤명호, 오른쪽으로는 불향각 등 만수산이 그리고 왼쪽으로는 17공교와 이어진 작은 섬, 멀리 곤명호 건너에 아름다운 하얀 옥대교(玉帶橋)가 바라보이는 등 절경으로 감상할 수 있다.
이화원에대해 알려면 아무래도 이곳의 주인인 서태후에 대해 알아야 할겄같아 적었다. 재미 있으니 읽어 보시기 바람
서태후는 만주 귀족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전란으로 인하여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리하여 어릴 때부터 황궁에 들어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을 고대하였다. 그러다가 17살에 수녀(궁녀)로 뽑히어 황궁에 들어갔고 후에는 제7대 함풍황제의 황귀비로 되었고 제8대 동치황제의 생모로 되었고 제9대 광서황제의 이모로 되었던 것이다.
제7대 함풍황제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바로 서태후와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함풍황제가 죽은후 서태후가 낳은 6살난 아들이 황제로 되면서 서태후는 황비에서 황태후로 되었다. (그리하여 28세부터 수렴청정하기 시작하였는데 중국을 통치한 시간이 거의 48년이나 된다. 서태후의 이름은 나라씨였는데 황제의 황후가 동쪽채에 살았기에 동태후, 황비로 있던 나라씨가 서쪽채에 살았기에 서태후라고 부르게 되었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건립한 나라였고. 만주족은 8기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상3기, 하5기로 나누는데 서태후의 가정은 상3기에 속했다. 귀족 집안이었다. 17살에 황궁에 들어간 서태후는 황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일년동안 노력하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그는 황제의 내시들에게 부탁하여 황제가 산책할 무렵 준비하고 있던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서태후는 노래를 잘 불렀는데 황태후로 된 후부터 매일 경극을 보았고 중국의 경극발전에 아주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산보를 하던 황제가 은은한 노래소리를 따라 찾아가보니 웬 젊은 여인이 사색에 잠겨 노래를 불렀는데 이때로부터 서태후를 알게 되었고 (황궁에 궁녀, 황비가 너무 많기 때문에 황제의 눈에 들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왕자를 출산했다. 역사에 의하면 함풍황제 생전에 서태후는 그렇게 총애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태후가 48년이나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서태후가 함풍황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아주었기 때문이다
서태후가 총애를 받지 못한것이 사진을 보니 알만하다
거기다가 욕심과 고집도 세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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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이화원의 곤명호는 서태후가 명하여 판것이라 하지만 이화원은 청나라 건융황제시기에 건설되였어요.
건융황제때부터 청나라 황제의 별장으로 볼수 있고 또 한 곤명호를 파서 만수산을 만들었습니다.
곤명호는 건륭황제때부터 청나라 북경수군의 훈련기자이기도 합니다.
즉 건륭황제가 곤명호에 갈때마다 수군의 군사연습이 즉시로 진행합니다.관련 글에 의하면 장면이 굉장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황제가 이화원 갈려면 차타거나 말타지 않아요.자금성에서 배타고 물길따라 곤명호까지 가서 이화원의 부두에서 내립니다.
[불향각,佛香閣]
저 뒤쪽 산 자락에 보이는 건물이 불향각이다
만수산 전산 비탈 21m 높이의 거색기반 위에 건축, 남쪽은 곤명호를 마주하고 북쪽은 지혜해불전을 등지며, 이 불향각을 중심으로 각 건축군이 매우 정연하고 대칭되게 양날개로 펼쳐지면서 서로 호응하여 마치 한마리의 박쥐모습을 하고 있다.1860년 불향각은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그 후 원상태로 재건하였는데 이는 라마교의 건축물이다.
이화원은 북경시 서북 교외에 위치, 도심에서 약 19키로미터 거리로
청나라 때의 황실 원림과 행궁이었다. (서태후의 여름 별장)
이화원의 원명은 청의원이며 1764년에 건조되었으며
부지 290헥타르, 그 중 수면이 220헥타르이다.
원내는 궁정구, 전산 전호구, 후산 후호구 3개 경치구로 나뉜다.
전당, 누각, 정자가 도합 3,000여칸으로 황제와 황후가
정치 활동을 하며 휴식, 유람하던 곳이다.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1888년에
서태후가 해군 경비 500만냥 배근을 유용하여 재건,
10년만에 완공, 이름을 "이화원"으로 고쳤다.
장랑,長廊]
동쪽의 요월문에서 서쪽의 석장정까지 총 길이 728미터, 도합 273칸의 화랑으로 중국 회랑 건축 중 제일 크고 제일 길고 제일 명성이 높은 장랑이다.장랑의 채색화 제재는 꽃, 새, 나무, 돌, 산, 물, 인물 등 매우 광범위하다. 8세기 중엽 건륭 황제(기원1736-1796년 제위)가 궁정의 화가를 서호에 파견하여 사생하게 하였는데 546폭의 서호 경치를 그려 장랑의 273칸 화랑의 들보에 전부 옮겨 그렸다.금세기 60년대 중국정부는 서호풍경화를 보류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특색을 지닌 채색화 1만 4천여폭을 더 그려 장랑을 제일의 화랑으로 되게 하였다.
어디서 음악소리와 우렁차고 정돈된 합창소리가 들리기에 무슨 행사를 하는가해서
가보니 남여 어른들이 모여 색스폰이나 아코디언에 맞추어 찬송가를 부르듯 합창하고 있다.
가이드에게 뭔 일이냐고 물어 보니, 저분들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지만 저렇게 수시로
무언의 약속처럼 모여 노래를 부르며 스트레스를 풀고 취미생활을 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공원 같은 곳에서 몇번인가 저런투의 합창 소리를 들은것 같다.
이 중국인들 수시로 춤과 노래 태극권 이런것으로 곳곳에 모여 취미생활을 한단다
이런것은 정말 본 받을만 한 문화라 생각된다.
북경 요리 : 차이껀시앙 파이구(菜根香排骨 )
먼저 돼지갈비를 튀겨낸 후, 매콤 달콤한 양념장에 버무린 것으로 한국의 양념 통닭을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북경 수도박물관
중국역사박물관 다음으로 큰 고궁박물관
공산당 집권 후 출토한 북경 유물만 전시한다는 지하 1층 지상 6층
로비에 들어서면 한 지붕 아래에 두 개의 빌딩과 커다란 종이 있는 것 같다
왼쪽 종 모양의 원형 전시실은 예술분야인 미술, 회화, 서예품...
오른쪽에 있는 두 개의 빌딩이 마주한 듯한 유리벽 일반 전시관은 주제별 전시관으로
역사유물과 건축물, 북경문화 거리 풍경, 혼례식, 풍물패, 장례식 행렬 등
백옥 십이지신상과 술잔, 벼루, 먹, 서화, 서예
팔뚝보다 큰 붓. 남빛 비단에 황금빛 자수 곤룡포, 아들 백 명을 낳으라는 황후의 백자의百子衣,
귀부인이 신었던 일곱 살 아이 신 같은 전족
붉은 색이 악귀를 쫓고 밝은 기운을 부른다고 붉은 옷에 붉은 가마 혼사 행렬,
대문 앞에 돌 조각품이 사자이면 황족, 북이면 무관, 벼루이면 문관,
사합원이라 부르는 전통 북경 가옥에 붉은 장막이 있는 신혼 침실,
옛 그림 그대로 따라 만든 마을 미니어처
시장에서 흥정하는 풍경, 사발을 엎은 듯 동그란 젖을
젖꼭지까지 다 내놓고 미소 짓는 섹시한 부처,
넓은 방 가득히 걸어둔 익살스러운 음화淫畵들, 도자기와 도요陶窯, 토용土俑, 사치품, 서민용품등
그냥 그렇고 그런 유물들을 , 별 감명 없이 보는데 - - -
아니 이런 - - - ?
이런 도야지 같은 작자들이 ?
연대별 지도를 그려 놓았는데 세상에 그 지도에
한국해도 아니고 동해도 아니고 동해와 일본해 연기명도 아니고
일본해로 표기 되었다니 - ! !
이 박물관이 불과 몇년전 건축되었는데 도데체 우리 정부는 뭘했는가 - -?
동해가 일본해 이면 동해에 있는 독도나 울릉도는 - ?
동해물과 백두산이 - 애국가는 ?
동해에서 해수욕하는 한국사람들은 일본해에서 해수욕하나 - ?
속이 불글 부글 했지만,
일단 청와대와 외무부에 이사진을 올리고 대응방안을 물어야 할거다.
이곳은 박물관이기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보며 특히 외국인들도
많이 볼것이다. 반드시 고치도록 노력해야 하며
우리 국민 또한 외국인들 자국민들 할것없이 이것을 알려야 한다.
이렇게 3박 4일의 여정을 끝으로 부자간의 북경방문기를 마친다.
장성한 대한민국의 청년이 된 아들과 함께한 여행-
아들아 - . 이번 여행을 통해 무언가 라도 얻는게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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