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갑이와 종욱이 부인이 내려온김에 평소에 잘 가지않는
문화유적지 몇곳을 안내한다.
먼저 경주라는 명칭
경사경(慶) 고을주(州) : 경사스러운 고을 ! 그러나 - - - !
경애왕이 포석사에서 풍전등화의 나라를 살리기위해 제를올리다
견훤에 발각되 자결하는통에 새로임명된 신라의 마지막왕 경순왕은
너무도 잔인한 백제보다 왕건에게 나라를 맏긴다.
신라를 얻게된 왕건은 월성에와서 월지(안압지)에 앉아보니 과연
황금의 나라 천년고도 답게 온 도성안의 도로정비나 집 또한 모두가
기와집으로만 날아갈듯하고 북방에비해 고도로 발전된 문화를 보고
기쁨에 못이겨 오늘부터 이곳을 "경사스러운고을 경주"라 명한다.
이때부터 "월성"에서 "경주"가 되었으니 나라를 잃고 적의 왕이 내린
경주라는 명칭은 참으로 경사스럽지못한 경사스런 경주가 된것이라
월성 토박이들은 나라잃고 고향이름조차 잃게된것이라 습쓸하다.
봉황대(鳳凰臺)
아직 발굴하지 않은 왕릉급 무덤이다
이 지역의 무덤들은 돌무지 덧널무덤형식이기에 도굴이 어려워
천마총이나 금관총처럼 여기도 금붙이가 수두룩나올거라 예상된다.
봉분위에 수백년묵은 느티나무가 자리하여 발굴에 걸림돌이
되긴하지만 운치는 상당히 있다.
사람한명의 무덤이라기엔 상식을 초월할정도로 크기에 조선시대에는
무덤이라 생각못하고 인공언덕정도로 착각했을정도 였으니
김수홍의 남정록, 박정의 동경유록등 조선문인들의 경주여행기에서
봉황대는 항상 전망대로 등장한다.
우리들 중고시절만해도 시가지 행열이 있으면 봉황대에 올라가
구경을했고 큰비가 오거나 사라호 대풍때에도 그 위로 대피를 할정도 였다
천년을 지켜온 이무덤의 주인은 과연 어떤분이였을까 - - - - - - - !
경주남산
경주남산은 신라최초의 왕 혁거세 거서간이 태어난곳이기도하고
최초의 궁성이 세워진곳이며 또한 비운의 왕이라 불리는 경애왕이
자결하면서 신라가 망하게되는 그곳 "포석정"이 소재한
그야말로 신라의 흥망성쇄를 함께한 곳이 바로 남산이다.
삼국전쟁의 오랜 소용돌이 속에서 신라의 백성들은 이곳 남산에다
탑과 암자들을 세워 그들의 심산한 마음을 의지했던 곳이기에 발자욱
딛는곳마다 탑과 불상이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삼국유사에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長 塔塔雁行)이라 절이 밤하늘에
별처럼 늘어섰고 탑이 기러기떼 날아가듯 많다고 적혀있다.
금오봉 연화대
동남산 칠불암
늠비봉 5층석탑
남산 늠비봉
남산 나정(蘿井). 사적245호.(발굴중)
아래사진은 오릉을 지나 신라최초의 거서간 박혁거세가
태어난 나정.(혁거세가 태어난 삼국유사이야기는 생략한다)
서라벌(徐羅伐)이야기
유사에 보면 육부촌장들은 남산의 서쪽기슭에 궁궐을짓고 범상한
남여 두 아이를키워 왕과 왕비가 되고 나라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지금 풍속에 경(京)을 "서벌"이라 하는것은 이때문)이라
했다.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고도 불렀다.
처음에 왕후가 태어났을때 계정(鷄井)에서 테어났으므로 "계림국"
이라고도하였는데 후세에 신라(新羅)라 정했다한다.
창림사지(신라최초의 궁궐이 있던 자리)
창림사는 삼국유사에 신라최초의 궁궐이 있던곳에 세워진
사찰로 쌍탑인 삼층석탑은 남산일대에서 규모가 가장크고 웅장한
석탑이지만 상륜부는 사라지고없다 .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5단으로
8세기 중반이전의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이다.
창림사는 창건연대가 정확치 않으나 신라명필 김생(金生)이
창림사비 쓴것을 원나라 조자양이 찬양했다는 내용이 전해져 김생이
태어난해가 711년이니 8세기경에 존재했다는것을 유추할수있다
신라 최초의 궁궐이 있던 창림사지, 궁궐의 옛터는 흔적없이
사라지고 절터마저 아름다운 쌍귀부 한쪽과 석탑만이 자리를
지키고있고 바로인근에는 육부전, 나정, 남간사지 당간지주,
일성왕릉 등이 새로운천년세월의 중반을 지키고 있었다.
창림사 삼층석탑 (보물제1867호)
삼층석탑의 조성시기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년)가
이곳을 찾았을 때 모사해 둔 ´무구정탑원기(無垢淨塔願記)´를 근거로
신라 문성왕 때(855년)로 보고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다소 이견이 있다.
2층 기단에 팔부신중 중 네분만 살아남았습니다.
창림사 삼층석탑 팔부신중 조각은 규모와 완성도면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되며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팔부신중상이 조각된 예는
《안동 법흥사지 전탑》, 《화엄사 사사자탑》, 《인용사지탑》, 《진전사탑》
등과 인왕상이 조각된 《장항리사지탑》, 십이지신과 사천왕상이 조각된
《원원사지탑》 등과 조각수법을 비교해 볼 때도 기량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사례로 인정받고 있다.
남간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909호)
장창골 혁거세 탄생한 나정 앞 남산기슭에 자리한 남간사(南澗寺)
창림사지 인근에 당간지주 두개만 외롭게 서있는곳이 남간사터 다.
남간사지 석정, 마을 우물-경주땅 우물은 품격이 다릅니다
포석정(鮑石亭)
포석정은 63개의 돌로 이루어져있으며 모양은 전복을 닮아
포(鮑, 전복)석정(石亭)이라 부른것같다.
지금 돌틈이 듬성듬성 한것은 일제때 1915년에 철거후 재설치 과정에서
시멘트로 덮어버린 석굴암처럼, 포석에 오래된 돌을 다른돌로 보충하는등
원상복구를 하지않고 임의작업으로 수로곡석(水路曲石)의 원형을 잃어버렸다.
최근 우리 학자들이 모여 실제 저와같은 모형을 만들어 전시 해놓았는데
저 홈에다 물을 부어 잔을 띄우면 잔이 돌면서 홈진 곳에서는 회돌이까지
하는것을 볼수있다. 다만 물살 물의 힘과 잔속의 물 량에따라 조금씩
달리 나타난다.
이것은 중국동진시대부터 유상곡수라하여 왕희지의 난정집서(蘭亭集序)를
있게한 시회(詩會)가 있었는데 이와 유사한 역할을 했을것이다.
우리가 어릴때 잘못알려진 역사로는 신라왕들이 이곳에서 술잔을
띄우고 흥청망청 하다가 나라가 망했다고 배웠지만 1999년 이일대
발굴당시 각종 건축물의 잔해들과 포석이라 새겨진 기와조각이 나왔고
또한 수많은 제기들이 나왔다.
이에 우리 학자들은 이 포석정에는 여러건물들이 있었음을 알게되었고
포석이라는 석구하나는 여기 여러건물들중의 하나이며, 화랑세기에
포석사(鮑石祀)라는 단어가 나와 제사를 모시는 사당임을 알수있었고
또한 이곳에서 많은 제기가 나온것으로보아 포석정은 나라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었다 추정이되고, 특히 견훤이 도성안까지 쳐들어왔는데 왕이 죽음을
무릎쓰고 술마시고 놀았다거나, 또 경애왕이 자결할 그 당시가 음력11월로
엄동설한에 꽁꽁얼어 술잔이고 물잔이고 야외에 띄우고 놀았다는것은 이해
안되는것이라 아마도 경애왕은 패망해가는 나라의 마지막 할수있는일이
이곳 포석사에서 신께 빌다가 적에 발견되어 자결했다는것이 정답인것같다.
음주 가무하다 죽었다는 소문은 백재와 고구려에서 패전국을 비하하여
전해진 말이 그대로 내려온것이라 역사를 재정립 해야 할것으로본다.
지마왕릉(신라 6대왕) 제위 112 - 134년 지마이사금
남산 포석정 옆 인근에 있다.
지마왕은 백제와 동맹관계였고 말갈물리치고 가야와는 충돌.
아버지 파사왕의 장자로 순탄하게 왕위를 계승했으나 아들이 없어
큰아버지 일성왕에게 왕위를 물려줌.
아버지 파사왕(5대)은 유리왕(3대)의 아들로서 막강한 세력의 김알지
손녀에 장가들어 위에 형(7대 일성왕)을 제치고 고모부인 4대 탈해왕에게
왕위를 이어받았고 그아들 지마왕(6대)에게 왕권을 물려준다. 그러나
아들이 없어, 원래 왕이 되었어야할 큰아바지 7대 일성왕 에게 왕권이
돌아갔다. 지마왕에게 아들이 생기지않은 이유가 있네 ~ ㅎ(내 생각)
능의 외부모습은 그냥 흙으로 덮은 원형봉토분이고 혼유석이
있으며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하고있다.
왕릉바로앞 채소농장이 우리 동기 최인숙 동생이 경영하는 농장이라
나는 남산길갈때 삼불사에 차를 두고 태진못을 지나 이앞으로 늘상
다니기에 가끔 보긴해도 들어가볼시간이 안된다.
보문(普門)
이제 문무대왕면으로 가면서 보문을 지나 보불로에서 새도로를 타고
감포에서 식사후 골굴사로 간다
창밖에 보문을 지나면서 우리가 흔히 경주의 큰 유원지, 사람많은곳 하면
보문단지를 말한다.
대부분 잘알겠지만 보문이란 단어는 유원지와는 참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신라는 법흥왕 이전부터 거의 불교의 나라로서 천년을 이어왔으니 도읍지인
경주는 모든것이 불교와 연관이 있는건 당연지사다.
보문단지를 조성하기전, 이 들에 보문사 절이 있어서 그 이름을 따 보문단지라
했지만, "보문"은 불교에서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시는 관세음보살께서
보타락카라는 산에 계시다가 중생이 괴로움에처해 관음보살을 찾으면
그 괴로움해결하러 나타나는 문을 보문이라 하는데 괴로움의 형태에 따라
중생의 성향에따라 또 그 숫자에따라 각각의 형태로 나타나므로
"넓을 보(普)" 자 이지만 넓은문, 큰문 이란뜻이 아닌 "전체" "모든것"을
뜻하는문, 자비로서 중생의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수있도록 열려있는
부처님의 문이 보문이니 유원지와는 좀 안맞지만 보문은 부처님 마음속에
쉬었다갈수있는 곳이라 생각하면 뜻에도 맞을것같다.
골굴사(骨窟寺) 선무도 총본산
문무대왕면 함월산 자락 기림사옆에 동해를 바라보며있는 사찰이다
골굴사는 643년 (27대 선덕여왕시기) 인도의 광유선사가 실크로드를
통해 신라에 와서 기림사와 함께 창건하였는데 여기 석굴사원은
일반사찰에서 볼수없는 이국적인 풍모가 담겨있다. 유명한
돈황석굴 처럼 실크로드상에 자리한 중국이나 인도의 사원에서
많이 나타나는 자연암반을 이용한 자연석굴이다.
지리적으로 옛날에 이곳에 화산이 있어 화산재가 떨어져 엉키면서 굳은것이
"응회암"이라 하는데 크고 작은 기포가 생겨 터지면서 구멍이나 굴들이
생기는데 이 골굴사도 이점을 잘 이용한것으로 보인다.
선무도(禪武道)
선무도는 청호당 양익(1934년 강원 홍천출생) 선사가 18세때 무상검이라는
검술을 터득했고 사법시험도 1차합격한 문무겸한 선사인데
무술본질인 "무심경계""대금강승문"등을 깨우쳐 한국불교 무도 대가로
알려지며 금강과같이 견고한 신체단련과 심령을 함께닦아가는 수행으로
선무도, 불무도라는 이름으로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게하는 수행법이다.
선무도가 처음에는 국내외로 인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외국인에게 더
인기가 있고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다.
현재 골굴사에는 후계자가 없어 겨우 한명이 명맥을 유지한다는 소문이다.
원효대사가 열반에 드신곳
원효 본명 : 설사(薛思). 별명: 소성거사. 명언 : 일체유심조(一體有心造).
원효는 불교뿐 아니라 유교 도교 법가사상까지 통달한 당대의 대 학자.
원효 파계 이야기
다른이야기는 접어두고 이것한가지 적어볼까요
원효는 요석공주가 과부인줄 알고 저작거리에나가 노래를 하는데
"자루없는 도끼를 내게주면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아오리로다"
이노래를 무열왕이 듣고 자루없는 도끼는 과부를 뜻함이니 대사가
요석공주를 생각하고 큰인물을 낳고자 하는구나 눈치를 채고는
나라에 현인이 생기면 좋은일이고 원효같은학자가 탐이 나서 신하에게
원효를 데려오라 명한다. 문천교앞에서 원효가 신하에게 물에 떠밀어
넣기 내기를 청하자 의아했지만 대사의 청이니 거절치못하고 응했다.
화랑을 거친 원효는 힘도 지략도 뛰어나지만 실수한척 물에 빠져버렸다.
원효는 옷을 말린다는 핑계로 요석궁에서 며칠을 지냈고 그리하여
신라 3대문장가의 하나요 대학자인 "설총"이 태어나게된다.
설총은 아버지고향 경산에서 자랐는데 소년기때 아버지가 계시는 절을
찾아 문안드리러 갔다가 아버지가 빗자루를 들고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쓸고 있기에 성큼 빗자루를 받아 마당을 모두 깨끗이 쓸어낸뒤 깨끗하게
다 쓸었다고 말씀드리니 원효가 모아둔 낙엽을 가득 담아와서 다시 마당에
뿌리는것이었다. 그리고는 - - -
"총아 ! 너는 부지런하고 총명하나 감성이 부족하구나. 감성이 풍부해야
옳은 사람이 된단다"
설총은 훗날 신라 10현중의 한사람이요 최치원 강수와 함께 3대문장가가 된다.
열반(涅槃)
원효대사가 이곳 골굴사에서 열반에 드시자 아들 총이 화장하여 분과함께
흙을 이겨 원상으로 다듬어 분황사에 모셨다는 기록이 있음.
마애여래좌상(보물 제581호)
얼굴은 화강암 몸체는 응회암으로 절묘한 조각상이다.
담백한 미소에 얼굴이 마치 동안처럼 젊은것이 한눈에 보인다
이런모습은 바로 돈황 석굴의 소조불상들에 흔히나타나는 특징이다
물결치듯 같은간격의 곡선으로 표현한 옷주름형태는 돈황석굴작품과
일치하는직감이 들며 실크로드 미술의 영향을 받은것으로 보인다.
감은사지(感恩寺址)
문무대왕면 대종천옆에 자리한 호국사찰.
문무왕이 삼한일통을 이룬후 부처의 힘으로 왜구의 침략을 막으려는
염원으로 짓기시작하여 아들 신문왕2년(682년)에 완성하였다.
문무왕이 유언을 남기며 "내가 죽으면 저앞 동해에 수장하라.
내가 용이되어 이나라를 지킬것이다" 신문왕이 절을 완공하고
아버지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은사"라 이름하였다.
현재 감은사는 3층 쌍탑과 금당및 강당등 건물터만 남아있다.
금당에는 일반건물과 달리 바닦돌을 세워 통로를 만들어 바닦으로
용이 다닐수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동해에서 대종천을 통해 사찰앞
못으로들어와 감은사 금당을 드나들며 다닐수있도록 건축되었다.
감은사 삼층석탑(국보 제 112호)
이석탑은 참으로 아름다운데다가 현존하는 삼층석탑가운데 가장큰
석탑이며 역시 층급받침이 5개로 통일신라초기 것이라는게 뚜렸하다.
이탑에서 주목될것은 각부의 구성이 백제시대 초기석탑과 같이
많은석재를 사용한점인데 이것은 목탑양식을 계승한것으로
목조건축의 구조성을 가지고있다는 증거다.
또한 기단을 2단으로한 새로운 형식을선보여 이후 석탑의 시원양식을
잘보여주고있다. 1959년 탑을 해체보수하면서사리장엄구가 창건 당시
상태로발견되었고 사리공속에는 사각 금동사리외함, 집모양 금동사리내함,
유리로된 사리병이발견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문무대왕릉 신라제 30대(661-681년 재위)
수중왕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과 호국정신을
엿볼수있는 곳이다.
이견대(利見臺) 사적 제159호
신문왕은 문무대왕릉이 잘보이는 바닷가 언덕위에 이견대를 짓고 참배를 하였다.
또 동해에서 감은사로 용이 돌아다니게 하였는데 뒤에 용이 나타난곳을
이견대라 했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는 지금있는곳이 아니고 찻길 위 언덕에 이견대가 있던 자리라고한다.
만파식적(萬波息笛)
신문왕2년에, 해관이 동해에 작은산이 감은사로 오고있다
하여 일관으로하여금 무슨조화냐 물으니 "해룡이된 선왕과
천신이된 김유신이 보배를 주려한다"하여 왕이 이견대에 서서
보니 거북머리같은 작은섬에 대나무가 낮에는둘이 되었다가
밤에는하나로 합쳐졌다한다.
저 대를 베어 피리를 만들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 하여
피리를 만들었는데 과연 한번불면 몰려온 왜적이 물러가고
태풍이 일때 한번불면 바다가 잠잠해지니 "모든파도를
잠재우는 피리"로"만파식적"이라 부르고 신라의 국보로
삼았으며 왜적이나 말갈 등 노리는자가 많아 여러번 도난
당한적있으나 잘 찾아 현재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이 설화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후 흩어진 백제와 고구려
유민의 민심을 통합해 나라의 안정을 꾀하려는 호국사상과
정치적안정과 평화를 소망하는 신라인의 염원이 담겨있다.
지금 나라꼴이 엉망인 이시기에 만파식적을 한번 불어
정치하는 자들 정리를 좀했으면 좋겠다 ㅎ
(아래사진 문동옥씨의 만파식적 연주하는 모습)
이렇게 하여 오늘 노인들의 문화재 탐방은 끝이났다
한양댁. 대구댁 수고많이 했네요.
10월말이나 11월초 토함산 단풍이 절정일때 통지 할테니
토함산 단풍과 설악산 단풍 비교한번 해보이소
불국사의 단풍은 또 어떤지 아십니까 말로는 표현 못해요
그때는 내가 맛난것도 좀 대접할수있도록 넉넉한마음가져오소
( 토함산 단풍 미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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