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남산 문화재)

서남산 이야기(2)2012.1.20

죽전일지 2024. 7. 9. 10:42

 

  

자 - 이 부처님은 삼릉계 마애석가여래좌상 ( 문화재 158호 ) 이다

상선암 바로위의 이 부처님은 높이가 7m로 삼릉계에서 가장 큰 부처님이시다

광배는 자연 암반을 깎아 삼았는데, 깎아내다가 만 듯 거칠게 보인다

머리는 광배로 삼은 바위와 떨어져 보일 만큼 돋을새김을 하였으나

어깨 부분은 광배 바위 면에서 조금 떨어지게, 나머지 몸은 바위 면에 그대로 붙여서 선으로 그리듯 새겼다.

밑그림은 그냥 자연바위에 선각으로,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돋을 새김으로 윤곽도 뚜렸해지며

얼굴은 완전히 도드라져 깨끗하게 새겨졌다.

또한 옆에서 보면 바위에서 부처님이 서서히 앞으로 솟아나오고 있듯이 조각 되어있다.

이것은, "자연과 부처, 인간, 삼라만상 우주 전체가 하나" 라는

옛 신라 장인의 깊은 뜻이 담겨있다.

 

또 하나는, 법흥왕 이전 신라인의 고유신앙이 바위신이었다고 한다.

바위에서 부처님이 나타나고 있는 이 형상은

바위에향한 고유신앙을 부처로 바뀌게하는 바램도 여기에 묻어있다고 볼수있다.


풍만한 네모난 얼굴에 눈썹은 둥글고, 눈은 반쯤 뜨고 있다

코는 오뚝하고, 작은 입은 굳게 다물었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큼직하다.

쉽게 범접하기 어려울 만큼 근엄해 보이는 얼굴이다.

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대함에서 뿜어나오는 위엄뿐만 아니라

자비에 넘치는 얼굴 모습이다
나는 이 큰바위 부처님이 좋아 특별히 큰산을 가지 않으면 주말에 늘 이곳을 찾는다.

  

 

 

큰바위 부처님 아래  상  선  암

 

 

 

 

상선암에서 10분정도 내려가다 우측골에 우뚝 서있는 보물

삼릉계 석불좌상 ( 보물 666호)

 순백화강암으로 조성된 여래상이 화려한 연화대석 위에 앉아 계신다.

연화대좌는 하대석 없이 땅에 있는 지대석 위에 직접 놓은 중대석 위에 얹혀 있다

8각 중대석엔 면마다 안상(眼象)을 새겼다

안상이란 귀인들이 앉는 평상을 말하는 것이니 중대석 위는 절대로 존엄한 세계라는 뜻이다

이렇게 존귀한 평상 위에 보상화(寶相華)로 장식된 화려한 둥근 연꽃송이를 얹어 놓았으니

이 연꽃은 수미산 위에 핀 하늘나라의 꽃송이인 것이다.
이 불상대좌에는 이렇게 찬란한 광채나는 꽃송이를 만들기 위해

애쓴 신라인들의 무한한 정성이 어려 있다.

광배의 가장자리에는 타오르는 불길을 새겼는데 불꽃들이 춤추는 듯 약동하는 모습이다.

이렇게 화려하고 생기에 넘치는 석불광배는 경주남산에서 뿐 아니라 전 신라시대 불상에서도 예가 드문 걸작이다

이 불상은 어느 방향에서 보나 아름답다.

곁에 있는 바위들이며 계곡의 여울 등에 잘 조화되도록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여래상의 존명은 아미타여래라 생각한다. 동쪽을 향해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   파손되지 않고 원형대로 있다면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 - -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 - -
   

 

 

 

 

삼릉계석불좌상은 8~9세기경 조성된 작품으로, 오랜 세월동안 도굴등으로 머리는 땅에 떨어져 있고

광배도 떨어져 조각나 널려 있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3년 등에 이르러 정확한 고증작업 없이 불상의 안면을 콘크리트로  

보수 처리하는 등 엉성한 모습으로 오히려 훼손되어 있었다

2007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남산 삿갓골 제1사지 석불입상, 남산 미륵곡석불좌상(보물 제136호),

안계리 석불좌상(문화재자료 제92호), 남산 용장계석불좌상 등

비교적 안면이 온전한 석불 등을 참조해서 보수했다

광배의 경우 10여 개로 조각난 편(片)을 접합해 원형을 살리고자 했으며,

  결실된 상부는 새로운 석재로 조형해 통일신라시대 광배의 윤곽에 최대한 가깝게 조성했다

 

1910년모습 (좌 흑백)파손된 머리가 좌대옆에 보인다

정비 전 모습 (우)는 어디로가고 없고 얼굴모습은 딴판이다

 

 

 삼릉계석불좌상의 광배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두 줄 돋음새김 된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으로, 식물 모양의 장식 무늬 등이 한층 돋보인다.

 

 

 

어느 불자가 수도했는지

임자없는 암굴이 역사를 지켜오고있다

 

 

 

                                                      삼릉계 선각 여래좌상 ( 문화재 159호)

이 선각상 역시 유홍준 전 문화부장관이 입에 침이 마르듯 자랑하는 보물이다.

석불좌상에서 능선으로 조금 더 나아가면 약 10m 높이의 큰 바위에

선각으로 된 여래 좌상이 나온다.

큰 연꽃위에 앉아 얼굴만 돋을 새김으로

옆으로 떨어져서 보면 입체적이다.

암벽 중앙에 지름 2.5m 되는 큰 연꽃위에 앉아 설법인을 표시하고 있는 如來像(여래상)이 새겨져 있다.

몸체는 모두 선각으로 나타내었는데 얼굴만은 돋을 새김으로 표현되었다

눈썹과 눈은 아주 가깝고 코는 길고 입술은 두껍고 커서

균형잡힌 얼굴이라 할수 없으나 소박하여 위엄이 있다.

중요한 선은 굵게 그었고 옷주름같은 것은 가늘게 그어 變化(변화)를 주었다

全體(전체)에서 소박하고 구수한 맛이 풍긴다. 그러나 신라 불상들처럼 세련되지 못했다.

年代(연대)는 高麗時代(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고있다.

바위면의 중간쯤에 가로로 갈라진 홈이 파여 있는데,

위쪽에 불상을 조각하였으며, 연꽃대좌의 아랫단은 홈 아래에 걸쳐 있는것이 특이하다.

 

 

 

삼릉계 선각육존불 ( 문화재 21호)

성각여래상에서 조금만 더 아래로 내려가면 또 보물이 있다

그림으로 그려서 쪼아낸듯한 이런 작품은 보기 드문일로 선각 마애불  로는

어뜸가는 작품으로 평가 되고있다.

앞쪽 삼존불은 좌우 협시불이 웃옷을 벗고 꽃쟁반을 들고 꿇어 앉아있는

모습은 보기드문 작품이다.

 

 

 

서쪽 암면의 아미타삼존은 석가삼존과 반대로 여래가 연꽃 위에 서 계시고 양쪽 협시보살은 연꽃 위에 앉아 있다. 여래는 오른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가슴에 들고 왼손바닥은 위로 하여 배 앞에 들고 있다. 가사는 편단우견으로 몸에 걸쳤는데 신광은 없고 두광만 원으로 나타나 있다. 왼쪽의 관세음보살상은 여래쪽으로 향해 윤왕좌 (輪王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는 법)로 앉아 꽃쟁반을 들었고 오른쪽의 대세지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반대 모습으로 앉아 역시 꽃쟁반을 들고 있다.

 

선각아미타 삼존불

두 보살은 모두 둥근 구슬목걸이를 걸었고 팔과 손목에는 팔찌를 끼었다. 어깨에는 얇은 천의를 걸쳐 천의자락에 나부낀다. 여래가 앉아 계시고 협시보살들이 서는 예는 보통 있지만 여래께서 서 계시고 보살들이 앉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바위 위에는 홈을 파서 빗물이 바위면을 적시지 않게 물길을 돌려놓았다. 또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고 많은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으니 바위 위에 빗물을 가리는 간단한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신라시대 조각품은 많이 볼 수 있으나 그림은 거의 볼 수 없는데, 이곳에서 신라의 그림을 엿볼 수 있으니 귀한 유적이 아닐 수 없다.

 

 

 

 

  

냉골 석조여래좌상

이렇게 등산로로 내려오면 길옆 바위 위에 머리 없는 석불좌상(石佛坐像)이 앉아 계신다.

근년까지도 계곡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어 지금 장소에 앉혀 놓은 것이기 때문에  마멸이 없고 옷주름들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다만 머리가 없어지고 두 무릎이 파괴되어 손 모양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편안히 앉은 자세며 기백이 넘치는 가슴이며 넓은 어깨는 8세기 중엽 신라 전성기의 위풍당당한 불상이다.
특히 왼쪽 어깨에서 가사 끈을 매듭지어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영총(纓總)수실은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우리 나라의 특색 있는 장식품인 매듭은 먼 신라 때부터 전해 왔다는 것을 이 가사 끈이 말해 주고 있다

부처님의 아래옷(裙衣)을 동여맨 끈도 예쁜 매듭으로 매어져 있다

이 불상은 용장사(茸長寺)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처럼 가사끈이 있기때문에

 

존명을 정하긴 어려우나 여래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목이 없지만 인근 계곡을 잘 찾으면 목을 두상을 찾아낼수도 있다. 그렇게만되면

어디에도 뒤지지않는 예술작품이라고 한다

  

석조여래 좌상에서 10여m 떨어진곳에

삼릉계 마애관음보살상이 있다 ( 유형문화재 19호)

기둥모형에 돋을 새김으로 새겨진 부처님으로 머리에 보관을 쓰고 정병을 들고있고

이마에 미륵불이 새겨져 있어 자비로운 중생을 구제 해주는 관음보살 임을 알수있다

돋을 새김으로한 뒷 바위 자체를 광배로 이용하여 자연과 인공이 조화된

통일 신라시대의 작품이다.

 

 



 

 

 

삼릉 (사적 219호)

8대 아달라.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이 능을 설명 하기전에 미추왕릉 천마총을 한번 생각해 보자

천마총은 엄청난 숫자의 보물들이 출토되었다

천마총은 돌무지 덧무덤이라고 해서 땅에 목곽과 부장품을 놓고 위에 호박돌을 쌓은 후 다시 봉분을 쌓는 형태로

3세기에서 6세기 초반 경주지역에서만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무덤 양식으로 대표적인 예가 천마총이다.

 이 형태의 무덤은 세월이 흘러도 봉분이 무너져 내리지 않기에 경주 지역에 남아 있는 대형 고분들은 대부분

돌무지덧널무덤이라 보셔도 무방하며 도굴도 쉽지 않기에 발굴을 하면 삐까번쩍 보물들이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삼릉의 이 능 들은 도굴로 파혜쳐 졌을때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 돌방 무덤 형식이다

이 봉분둘레에 김유신 묘처럼 석을 둘렀던 것으로 다 없어지고 흙무덤만 남았다

돌방무덤은 말 그대로 돌로 석실을 만들고 한쪽에 입구를 내 출입문을 만든 후 돌방에 시신을 안치 후

입구를 막고 그 위에 봉분을 쌓은 형식이다.

돌무지덧널무덤에 비해 봉분의 크기가 작아졌으나 추가 매장이 가능한 형태였습니다

안타갑게도 도굴이 용이해 경주의 상당수의 돌방무덤은 도굴을 당했습니다.

 

다음은 이 릉 주인에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신라말기 52대 효공왕(김씨)이 아들이 없어 백성들께 왕의 추천을 요구한바

추천 된 사람이 바로 53대 박씨, 여기 3릉중 가운대 릉의 주인 신덕왕이다.

54대 경명왕(맨 아래릉)은 신덕왕의 아들로 박씨 이다.

 

또 하나의 릉, 3릉 인근에 있는 비운의 왕 55대 경애왕

경애왕은 신덕왕의 둘째 아들 (경명왕 동생)로서 릉 위치는 3릉 남쪽에 쓸쓸히 누워있다.(박씨 마지막 왕)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왕비와 궁중 시녀들과 함께 백제의 견훤에게 잡혔다.

경애왕이 보는 앞에서 왕비가 능욕을 당하고 시녀들이 참살당하자 스스로 자결한 비운의 왕이다.

 

견훤은 왕이죽자 이전 왕조의(김씨 왕조) 족친들중에 한명을 골라 우선 신라통치를 맏겼다.

그왕이 신라의 마지막왕 56대 경순왕(김씨)이다.

경순왕은 백제의 침탈과 겁탈 신라백성들의 핍박을 보다못해

당시 힘이 대단했던 고려에 정권을 내어주려한다.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죽음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으나 경순왕은 우리가 죽는것은 두렵지 않으나 백성들의

핍박은 더 볼수가 없다 하고 고려 왕건에게 백성을 구제하는 조건부로 나라를 맏긴다.

마의태자는 홀로 금강산으로 떠나 풀뿌리 약초로 연명하다가 쓸쓸하게 죽게되고

천년사직의 신라는 그렇게 문을 닫게 됩니다.

 

경순왕의 릉은 경주에 이장하지도 못하고 지금 경기도에 홀로 계십니다.

 

배리삼존석불입상 보물 63호

 

 

삼국시대의 석조삼존불입상이다. 보물63호이며 7세기초기에 조성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주변에 그냥 넘어져 있던 것을 조선시대인 1923년에 일으켜 세우고 토담으로 담장을 둘렀다.
그동안 보호각 없이 노천에 방치되어 있다가 보호각 건립을 위하여 1987년과 1988년 2차례에 걸쳐 주변을 발굴하고 보호각을 세웠으나 
그 뒤 보호각으로 인한 빛의 차단으로 잔잔하던 미소가 사라지고 담장 때문에 통풍이 잘안되어 풍화가 가속된다는 지적이 많아 담장을 철거하였다. 

 

 

보호각이 설치되기 전의 배리삼존불

  

우협시보살의 모습

(지금은 복원되었지만 아랫쪽 완전히 잘라진 모습이 보인다)

 

보호각이 없을 때 본존의 미소.

원래 노출되어 있던 이 삼존불에 기와로 지붕을 이어 보호각을 설치한 이후로

본존불은 특유의 천진한 미소를 잃어버렸다

 

 

삼국시대 만들어진 불상들은 대부분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통인을 취하고 있다.

 

이 불상들은 모두 어린아이와 같은 귀엽고 명랑한 미소를 띠고 있어 매우 친근한 인상을 준다. 신체비례도 거의 5등신에 가깝다. 아마 불교 유입 초창기에 만들어져 부처의 위엄을 강조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으로 짐작된다.

 

풍만하고 네모난 얼굴에 아기 같은 모습, 천진스로운 미소, 신체를 다 가린 두꺼운 옷, 시무외인·여원인의 수인, 4등신대의 비율은 삼국시대 불상들의 특징들이다

 

백제의 미소라 일컫는 서산마애불과 태안마애불, 김유신장군의 전설이 있는 단석산 신선사의 미륵불, 선도산 아미타삼존불 등이 삼국시대 불상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삼존불은 흔히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양협시로 한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으로 해석된

 

 

 

 

부처님의 손모양을 수인(手印)이라 하는데. 우리가 문서에 도장을 찍듯이 부처님은 손모양으로 약속을 표시한다.

중앙의 본존불의 오른손은 손바닥을 모두 펴서 위로 치켜든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해서 편 시여원인(施與願印)을 하고 있는데, 우리의 모든 두려움과 근심을 없애고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겠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협시보살(협시불)

협시보살(脇侍菩薩)은 부처를 좌우에서 보좌하는 보살을 말한다.

보살(菩薩)이란 범어(梵語:산스크리트)로 '보디사트바(bodchi-sattva)'라 하는 데 '보디'는 깨달음을 '사트바'란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또는 마음을 뜻한다.

소리나는 대로 옮겨 보면 보리살타인데 이것을 줄여 보살(菩薩)이라고 부른다. 깨달음과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는 여래의 뜻을 받들어 위로는 도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구제(上求菩堤下化衆生)하는 역활을 담당하고 있다. 
보살의 좌우를 구분할 때는 본존을 중심으로 한다. 바라보는 사람을 중심으로 할 때는 향좌(向左), 향우(向右)라고도 한다.

 

 

우협시보살 

                                                                            (대세지 보살)

 

어깨에서부터 발등까지 늘어뜨린 영락은 구슬과 꽃모양으로 장식되었는데 이것은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걸쳐 유행된 중국 수나라 양식이라 보살상의 연대추정에 열쇠가 된다.

두 팔과 몸체 사이가 뚫려 있어 입체감을 주는데, 이는 매우 독특한 양식이다.

보살상 뒤쪽을 자세히 보면 채색의 흔적이 남아있다.

 

 

 광배는 가장자리에 두 줄의 띠를 두르고 다섯구의 화불을 새겼다

 

 

우협시불

 이중의 연화대좌 위에 서 있는데, 목에서 다리까지 드리워진 구슬목걸이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다. 왼손에는 연봉우리를 들고 있다. 관대를 두르고 머리는 삼면보관으로 장식이 되어 있는데, 정면에 큰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다섯의 화불(化佛)을 조각한 원형 두광에 삼면두식(三面頭飾) 보관을 쓰고, 머리 양쪽에는 나비매듭진 관끈이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다. 두광의 화불은 부처님의 진리의 빛이 비치는 곳마다 부처님이 계시다는, 온 우주가 부처님 세상이라는 뜻이다.

 

 

좌 협시보살

(관음보살)

 

오른손은 펴서 가슴에 얹고 왼손은 아래로 드리워 정병을 들고 있다.

정병을 들고 있어 관세음보살로 추정한다.

머리에는 관대를 두르고 삼면보관으로 장식했다. 하지만 광배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다.

상반신에는 천의만을 두르고 있고 옷주름도 거의 생략된 상태이다.

발은 본존불처럼 네모난 모양인데 왼쪽 발이 약간 휘어져 있어 변화를 주었다

 

좌협시보살

 

좌협시보살은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하여 좌협시의 복잡하고 화려한 보살상과 대조적이다.
무늬가 없는 원형 두광에 삼면두식(三面頭飾) 보관을 쓰고 머리 양쪽에는 관끈이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다. 눈은 본존불처럼 지그시 감은 듯 두툼하고 입술선은 직선으로 나타나있어 본존불과 같은 환한 미소는 볼 수가 없다. 볼은 과장됨이 없는 사실적인 양감으로 나타내었다.

어깨는 당당하면서도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자세는 바로 선 듯 하나 자세히 보면 왼쪽 무릎을 살짝 굽히고 있는 삼굴자세 (三屈姿勢)를 취하고 있다.

 

 

 

 

코를 떼어 갈아먹으면 아들을 얻는다는 믿음 때문에 남산에 있는 불상의 코는 떨어지고 없는 불상이 대부분이다. 코는 남성을 상징하는데 사람의 코가 아니라 부처님의 코이니 더욱 영험이 있다고 믿었던  그릇된 기자신앙(祈子信仰)으로 불상은 자연스럽게 훼손이 되어버렸다. 코는 얼굴에 입체감을 주고 심정적으로는 자존심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일설에는 조선시대에 훼불(毁佛)을 할 목적으로 소문을 폈다는 설도 있다. 

                                                              <참고:'신라사람들'의 배동입불상설명문>

 

 

필자가 본 배리 삼존불 (보물 63호)

통통한 아이의상 처럼 인자한 미소를 띠면서도 익살스럽고 재미있게 조각되어 있다

중앙 본존불의 아미타여래가 왼손바닥을 아래로 내린것은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 주겠다는 약속이고

오른손바닥을 올린것은 두려움을 없에주겠다는 약속이다. 우협시보살은 대세지보살로 연꽃을 두르고 있다
좌협시보살은 관음보살이며 머리에 아미타불을 모시고 손에 정병을 들고있어 관음보살님이다

젓살이 빠지지않은 아이처럼 얼굴은 풍만하고 다문입과 아래로 뜬 눈은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을 표현하고 있다

백제시대 불상인 서산 마애삼존불과 얼굴 모습이 유사 하다 던가 하는점에서

삼국시대말,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이라 평가된다.

배리 라는말 - -?

拜자는 절배자다

 이곳에 유렴이라는 재상이. 돌아가신부모를위한 재를 올리려고 고승을 모시는데

찾아온 스님이 하도 꾀죄죄 하여 내 쫓았다

이 스님은 아무 말없이 장삼소매에서 작은물체를 내어 땅에 내려놓으니 호랑이되어 타고 갔다.

그제서야 크게 후회하며 수없이 절을 했다는 전설로 이동네를 배리라고 했다

 

6대 지마왕릉

 

지마왕 이전부터 말갈, 가야, 왜적 까지 자주 침략해 왔으나 평정을 하고

주변의 압독국(지금의 경산)등 소국들을 병합, 실질적인 국가로서의 형태를 만든 왕이다.

 

지마왕 보다 7대  일성왕 이야기를 잠깐 해 본다.

보통, 왕의 서열을 아들이나 조카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일성왕은 조카인 지마왕에게 왕좌를 받는다.

일성왕은 신라 3대 유리왕의 태자다.

태자가 어린 이유도 있겠지만 유리왕의 선친 남해왕의 유지도 있고해서

유리왕의 매제인 석탈해 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석탈해는 다음 왕위를 선왕인 유리왕의 태자 일성에게 물려 주어야 하나

 일성의 동생 파사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당시, 파사는 대단한 세력을 가진 김씨시조 김알지의 손녀와 결혼하여 처가의 위세도

높았다고 합니다. 하여간 동생이 왕위를 받았고, 또 그의 아들 지마왕에게 왕좌가 이어 집니다.

 

지마왕이 아들이 없자, 일성은 나이 팔십이 넘어 왕위를 조카에게 받게된

사연도 있어서 소개 했습니다. 

 

마지막 코스 포석정

포석정은 63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양은 전복의 껍질 형식으로 되어있습니다.

관련 학계로 부터 실제 모양을 1/2로 축소하여  물을 부어 잔을 뛰워 본 결과

실제로 잔이 돌았으며 중간 중간 잔이 회돌이 현상까지 잃어 난 대단한 구조물로

평가 됩니다.

중국 동진 시대부터 유행한 유상곡수라고 시회(詩會)가 있었는데

여기서도 시회를 열지 않았나 하는 추정을 하며, 통일 신라시대의 화려했던

궁중생활의 단면을 추정 합니다.

위에서 추정 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평소 이 포석정에서 왕들이 술을 마시며 신라를 망하게 했다고 배웠으며

경애왕 또한 여기서 술을 마시고 연회를 즐기다 죽은것으로 알고 있으나

최근 이 부근에서 출토된 기와에서 "포석" 이란 글자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대

화랑세기에 이 포석 이라는 단어의 뜻이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라고 명확히

나와 있습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면 나라가 풍전등화에 있고, 백제 군사가 코앞에

쳐들어 왔는데 여기 앉아 술과 노래를 했다는것은 이해 하기 힘들고

특히, 연회를 즐겼다면, 대신들이나 토호들과 함께 있어야 할텐데

왕비와 시녀들 등등이 여기 함께 있었다면 - -

이 구조물 인근의 포석 사당이나 아니면 이구조물의 영험을 통해

경애왕은 가족과 함께 어려운 국운을 신에게 간절히 소원하다가

견훤에게 적발되어, 왕비가 능욕을 당하고 가족이 죽는모습을 보며 자결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지배적이라

학계에서는 역사를 다시 재조명 해 보아야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산 하니 오후 2시 40분쯤 되었고. 아침 10시 20분경, 수미산을 향했으니

약 4시간 반 정도 걸렸습니다.

조금 강행을 했던 관계로 빨리 하산 한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모두에게 드렸으면 좋았을텐데,

몇장밖에 없어 상품으로 이용한 "천년의 미소"와 "천마도" 상품은

돈으로의 가치는 미흡하지만 그뜻이 깊기에 알리려고 준비했던 것입니다.

 

천마도

천마도는 미추왕릉 즉 천마총에서나온 것으로 말의 안장 양쪽에

달아서 늘어뜨리는 장니에 그려진 그림으로서

신라의 회화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작품이며

가치로 따질수 없는 것입니다.

천마도의 채화판은, 자작나무껍질을 여러겹 겹치고 맨 위에 고운 껍질로 누빈후

가장자리에 가죽을 대어 만든것입니다.

천마는 꼬리를 세우고 하늘을 달리는 모습으로 혀를 내민듯한 입의 모습은

신의 기운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흰색의 천마가 동물의 신으로서 죽은 사람을 하늘의 세계로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합니다.

 

천마도의 수건을 받으신분은 아마 천마를 타고 도솔천에 환생하실것으로 믿습니다. ㅎ ㅎ

 

천년의 미소

천년의 미소 라는 말이 문화계에 많이 떠도는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산행중에도 안내판이나 곳곳에 기와조각 모형의 안내판 이 있었고

시내곳곳에도 이러한 것들이 보입니다.

 

도데체 이것이 무엇이며 어떤 사연 있길래 - - - - ?

 

 

 

  

냉골 석조여래좌상

이렇게 등산로로 내려오면 길옆 바위 위에 머리 없는 석불좌상(石佛坐像)이 앉아 계신다.

근년까지도 계곡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어 지금 장소에 앉혀 놓은 것이기 때문에  마멸이 없고 옷주름들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다만 머리가 없어지고 두 무릎이 파괴되어 손 모양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편안히 앉은 자세며 기백이 넘치는 가슴이며 넓은 어깨는 8세기 중엽 신라 전성기의 위풍당당한 불상이다.
특히 왼쪽 어깨에서 가사 끈을 매듭지어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영총(纓總)수실은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우리 나라의 특색 있는 장식품인 매듭은 먼 신라 때부터 전해 왔다는 것을 이 가사 끈이 말해 주고 있다

부처님의 아래옷(裙衣)을 동여맨 끈도 예쁜 매듭으로 매어져 있다

이 불상은 용장사(茸長寺)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처럼 가사끈이 있기때문에

 

존명을 정하긴 어려우나 여래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목이 없지만 인근 계곡을 잘 찾으면 목을 두상을 찾아낼수도 있다. 그렇게만되면

어디에도 뒤지지않는 예술작품이라고 한다

  

석조여래 좌상에서 10여m 떨어진곳에

삼릉계 마애관음보살상이 있다 ( 유형문화재 19호)

기둥모형에 돋을 새김으로 새겨진 부처님으로 머리에 보관을 쓰고 정병을 들고있고

이마에 미륵불이 새겨져 있어 자비로운 중생을 구제 해주는 관음보살 임을 알수있다

돋을 새김으로한 뒷 바위 자체를 광배로 이용하여 자연과 인공이 조화된

통일 신라시대의 작품이다.

 

 



 

 

 

삼릉 (사적 219호)

8대 아달라.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이 능을 설명 하기전에 미추왕릉 천마총을 한번 생각해 보자

천마총은 엄청난 숫자의 보물들이 출토되었다

천마총은 돌무지 덧무덤이라고 해서 땅에 목곽과 부장품을 놓고 위에 호박돌을 쌓은 후 다시 봉분을 쌓는 형태로

3세기에서 6세기 초반 경주지역에서만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무덤 양식으로 대표적인 예가 천마총이다.

 이 형태의 무덤은 세월이 흘러도 봉분이 무너져 내리지 않기에 경주 지역에 남아 있는 대형 고분들은 대부분

돌무지덧널무덤이라 보셔도 무방하며 도굴도 쉽지 않기에 발굴을 하면 삐까번쩍 보물들이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삼릉의 이 능 들은 도굴로 파혜쳐 졌을때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 돌방 무덤 형식이다

이 봉분둘레에 김유신 묘처럼 석을 둘렀던 것으로 다 없어지고 흙무덤만 남았다

돌방무덤은 말 그대로 돌로 석실을 만들고 한쪽에 입구를 내 출입문을 만든 후 돌방에 시신을 안치 후

입구를 막고 그 위에 봉분을 쌓은 형식이다.

돌무지덧널무덤에 비해 봉분의 크기가 작아졌으나 추가 매장이 가능한 형태였습니다

안타갑게도 도굴이 용이해 경주의 상당수의 돌방무덤은 도굴을 당했습니다.

 

다음은 이 릉 주인에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신라말기 52대 효공왕(김씨)이 아들이 없어 백성들께 왕의 추천을 요구한바

추천 된 사람이 바로 53대 박씨, 여기 3릉중 가운대 릉의 주인 신덕왕이다.

54대 경명왕(맨 아래릉)은 신덕왕의 아들로 박씨 이다.

 

또 하나의 릉, 3릉 인근에 있는 비운의 왕 55대 경애왕

경애왕은 신덕왕의 둘째 아들 (경명왕 동생)로서 릉 위치는 3릉 남쪽에 쓸쓸히 누워있다.(박씨 마지막 왕)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왕비와 궁중 시녀들과 함께 백제의 견훤에게 잡혔다.

경애왕이 보는 앞에서 왕비가 능욕을 당하고 시녀들이 참살당하자 스스로 자결한 비운의 왕이다.

 

견훤은 왕이죽자 이전 왕조의(김씨 왕조) 족친들중에 한명을 골라 우선 신라통치를 맏겼다.

그왕이 신라의 마지막왕 56대 경순왕(김씨)이다.

경순왕은 백제의 침탈과 겁탈 신라백성들의 핍박을 보다못해

당시 힘이 대단했던 고려에 정권을 내어주려한다.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죽음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으나 경순왕은 우리가 죽는것은 두렵지 않으나 백성들의

핍박은 더 볼수가 없다 하고 고려 왕건에게 백성을 구제하는 조건부로 나라를 맏긴다.

마의태자는 홀로 금강산으로 떠나 풀뿌리 약초로 연명하다가 쓸쓸하게 죽게되고

천년사직의 신라는 그렇게 문을 닫게 됩니다.

 

경순왕의 릉은 경주에 이장하지도 못하고 지금 경기도에 홀로 계십니다.

 

배리삼존석불입상 보물 63호

 

 

삼국시대의 석조삼존불입상이다. 보물63호이며 7세기초기에 조성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주변에 그냥 넘어져 있던 것을 조선시대인 1923년에 일으켜 세우고 토담으로 담장을 둘렀다.
그동안 보호각 없이 노천에 방치되어 있다가 보호각 건립을 위하여 1987년과 1988년 2차례에 걸쳐 주변을 발굴하고 보호각을 세웠으나 
그 뒤 보호각으로 인한 빛의 차단으로 잔잔하던 미소가 사라지고 담장 때문에 통풍이 잘안되어 풍화가 가속된다는 지적이 많아 담장을 철거하였다. 

 

 

보호각이 설치되기 전의 배리삼존불

  

우협시보살의 모습

(지금은 복원되었지만 아랫쪽 완전히 잘라진 모습이 보인다)

 

보호각이 없을 때 본존의 미소.

원래 노출되어 있던 이 삼존불에 기와로 지붕을 이어 보호각을 설치한 이후로

본존불은 특유의 천진한 미소를 잃어버렸다

 

 

삼국시대 만들어진 불상들은 대부분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통인을 취하고 있다.

 

이 불상들은 모두 어린아이와 같은 귀엽고 명랑한 미소를 띠고 있어 매우 친근한 인상을 준다. 신체비례도 거의 5등신에 가깝다. 아마 불교 유입 초창기에 만들어져 부처의 위엄을 강조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으로 짐작된다.

 

풍만하고 네모난 얼굴에 아기 같은 모습, 천진스로운 미소, 신체를 다 가린 두꺼운 옷, 시무외인·여원인의 수인, 4등신대의 비율은 삼국시대 불상들의 특징들이다

 

백제의 미소라 일컫는 서산마애불과 태안마애불, 김유신장군의 전설이 있는 단석산 신선사의 미륵불, 선도산 아미타삼존불 등이 삼국시대 불상의 양식을 잘 갖추고 있다

 

삼존불은 흔히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양협시로 한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으로 해석된

 

 

 

 

부처님의 손모양을 수인(手印)이라 하는데. 우리가 문서에 도장을 찍듯이 부처님은 손모양으로 약속을 표시한다.

중앙의 본존불의 오른손은 손바닥을 모두 펴서 위로 치켜든 시무외인(施無畏印), 왼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해서 편 시여원인(施與願印)을 하고 있는데, 우리의 모든 두려움과 근심을 없애고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겠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협시보살(협시불)

협시보살(脇侍菩薩)은 부처를 좌우에서 보좌하는 보살을 말한다.

보살(菩薩)이란 범어(梵語:산스크리트)로 '보디사트바(bodchi-sattva)'라 하는 데 '보디'는 깨달음을 '사트바'란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또는 마음을 뜻한다.

소리나는 대로 옮겨 보면 보리살타인데 이것을 줄여 보살(菩薩)이라고 부른다. 깨달음과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는 여래의 뜻을 받들어 위로는 도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구제(上求菩堤下化衆生)하는 역활을 담당하고 있다. 
보살의 좌우를 구분할 때는 본존을 중심으로 한다. 바라보는 사람을 중심으로 할 때는 향좌(向左), 향우(向右)라고도 한다.

 

 

우협시보살 

                                                                            (대세지 보살)

 

어깨에서부터 발등까지 늘어뜨린 영락은 구슬과 꽃모양으로 장식되었는데 이것은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걸쳐 유행된 중국 수나라 양식이라 보살상의 연대추정에 열쇠가 된다.

두 팔과 몸체 사이가 뚫려 있어 입체감을 주는데, 이는 매우 독특한 양식이다.

보살상 뒤쪽을 자세히 보면 채색의 흔적이 남아있다.

 

 

 광배는 가장자리에 두 줄의 띠를 두르고 다섯구의 화불을 새겼다

 

 

우협시불

 이중의 연화대좌 위에 서 있는데, 목에서 다리까지 드리워진 구슬목걸이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다. 왼손에는 연봉우리를 들고 있다. 관대를 두르고 머리는 삼면보관으로 장식이 되어 있는데, 정면에 큰 연꽃이 조각되어 있다

 

다섯의 화불(化佛)을 조각한 원형 두광에 삼면두식(三面頭飾) 보관을 쓰고, 머리 양쪽에는 나비매듭진 관끈이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다. 두광의 화불은 부처님의 진리의 빛이 비치는 곳마다 부처님이 계시다는, 온 우주가 부처님 세상이라는 뜻이다.

 

 

좌 협시보살

(관음보살)

 

오른손은 펴서 가슴에 얹고 왼손은 아래로 드리워 정병을 들고 있다.

정병을 들고 있어 관세음보살로 추정한다.

머리에는 관대를 두르고 삼면보관으로 장식했다. 하지만 광배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다.

상반신에는 천의만을 두르고 있고 옷주름도 거의 생략된 상태이다.

발은 본존불처럼 네모난 모양인데 왼쪽 발이 약간 휘어져 있어 변화를 주었다

 

좌협시보살

 

좌협시보살은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하여 좌협시의 복잡하고 화려한 보살상과 대조적이다.
무늬가 없는 원형 두광에 삼면두식(三面頭飾) 보관을 쓰고 머리 양쪽에는 관끈이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다. 눈은 본존불처럼 지그시 감은 듯 두툼하고 입술선은 직선으로 나타나있어 본존불과 같은 환한 미소는 볼 수가 없다. 볼은 과장됨이 없는 사실적인 양감으로 나타내었다.

어깨는 당당하면서도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자세는 바로 선 듯 하나 자세히 보면 왼쪽 무릎을 살짝 굽히고 있는 삼굴자세 (三屈姿勢)를 취하고 있다.

 

 

 

 

코를 떼어 갈아먹으면 아들을 얻는다는 믿음 때문에 남산에 있는 불상의 코는 떨어지고 없는 불상이 대부분이다. 코는 남성을 상징하는데 사람의 코가 아니라 부처님의 코이니 더욱 영험이 있다고 믿었던  그릇된 기자신앙(祈子信仰)으로 불상은 자연스럽게 훼손이 되어버렸다. 코는 얼굴에 입체감을 주고 심정적으로는 자존심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일설에는 조선시대에 훼불(毁佛)을 할 목적으로 소문을 폈다는 설도 있다. 

                                                              <참고:'신라사람들'의 배동입불상설명문>

 

 

필자가 본 배리 삼존불 (보물 63호)

통통한 아이의상 처럼 인자한 미소를 띠면서도 익살스럽고 재미있게 조각되어 있다

중앙 본존불의 아미타여래가 왼손바닥을 아래로 내린것은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 주겠다는 약속이고

오른손바닥을 올린것은 두려움을 없에주겠다는 약속이다. 우협시보살은 대세지보살로 연꽃을 두르고 있다
좌협시보살은 관음보살이며 머리에 아미타불을 모시고 손에 정병을 들고있어 관음보살님이다

젓살이 빠지지않은 아이처럼 얼굴은 풍만하고 다문입과 아래로 뜬 눈은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을 표현하고 있다

백제시대 불상인 서산 마애삼존불과 얼굴 모습이 유사 하다 던가 하는점에서

삼국시대말,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이라 평가된다.

배리 라는말 - -?

拜자는 절배자다

 이곳에 유렴이라는 재상이. 돌아가신부모를위한 재를 올리려고 고승을 모시는데

찾아온 스님이 하도 꾀죄죄 하여 내 쫓았다

이 스님은 아무 말없이 장삼소매에서 작은물체를 내어 땅에 내려놓으니 호랑이되어 타고 갔다.

그제서야 크게 후회하며 수없이 절을 했다는 전설로 이동네를 배리라고 했다

 

6대 지마왕릉

 

지마왕 이전부터 말갈, 가야, 왜적 까지 자주 침략해 왔으나 평정을 하고

주변의 압독국(지금의 경산)등 소국들을 병합, 실질적인 국가로서의 형태를 만든 왕이다.

 

지마왕 보다 7대  일성왕 이야기를 잠깐 해 본다.

보통, 왕의 서열을 아들이나 조카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일성왕은 조카인 지마왕에게 왕좌를 받는다.

일성왕은 신라 3대 유리왕의 태자다.

태자가 어린 이유도 있겠지만 유리왕의 선친 남해왕의 유지도 있고해서

유리왕의 매제인 석탈해 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석탈해는 다음 왕위를 선왕인 유리왕의 태자 일성에게 물려 주어야 하나

 일성의 동생 파사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당시, 파사는 대단한 세력을 가진 김씨시조 김알지의 손녀와 결혼하여 처가의 위세도

높았다고 합니다. 하여간 동생이 왕위를 받았고, 또 그의 아들 지마왕에게 왕좌가 이어 집니다.

 

지마왕이 아들이 없자, 일성은 나이 팔십이 넘어 왕위를 조카에게 받게된

사연도 있어서 소개 했습니다. 

 

마지막 코스 포석정

포석정은 63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양은 전복의 껍질 형식으로 되어있습니다.

관련 학계로 부터 실제 모양을 1/2로 축소하여  물을 부어 잔을 뛰워 본 결과

실제로 잔이 돌았으며 중간 중간 잔이 회돌이 현상까지 잃어 난 대단한 구조물로

평가 됩니다.

중국 동진 시대부터 유행한 유상곡수라고 시회(詩會)가 있었는데

여기서도 시회를 열지 않았나 하는 추정을 하며, 

우리는 평소 이 포석정에서 왕들이 술을 마시며 신라를 망하게 했다고 배웠으며

경애왕 또한 여기서 술을 마시고 연회를 즐기다 죽은것으로 알고 있으나

1999년 이 부근에서 출토된 기와에서 "포석" 이란 글자와 여러건물터

그리고 많은 제기들이 발견 되었습니다..

그런대

화랑세기에보면 이 포석 이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라고 명확히

나와 있습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면 나라가 풍전등화에 있고, 백제 군사가 성안까지

쳐들어 왔으며 특히, 음력11월이면 꽁꽁언 설한에  여기앉아 술잔 띄우고 노래를 했다는것은 

이해안되고 또한, 연회를 즐겼다면, 대신들이나 토호들과 함께 있어야 할텐데

왕비와 시녀들 등등이 여기 함께 있었다면 - -

 

경애왕은 가족과 함께 어려운 국운을 신에게 간절히 소원하다가

견훤에게 적발되어, 왕비가 능욕을 당하고 가족이 죽는모습을 보며 자결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지배적이라

적국에서 패전국을 비하하여" 놀다 망했다고" 지어낸 말이

전해진것이라 판명됨에 

학계에서는 역사를 다시 재조명 해야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산 하니 오후 2시 40분쯤 되었고. 아침 10시 20분경, 수미산을 향했으니

약 4시간 반 정도 걸렸습니다.

조금 강행을 했던 관계로 빨리 하산 한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모두에게 드렸으면 좋았을텐데,

몇장밖에 없어 상품으로 이용한 "천년의 미소"와 "천마도" 상품은

돈으로의 가치는 미흡하지만 그뜻이 깊기에 알리려고 준비했던 것입니다.

 

천마도

천마도는 미추왕릉 즉 천마총에서나온 것으로 말의 안장 양쪽에

달아서 늘어뜨리는 장니에 그려진 그림으로서

신라의 회화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작품이며

가치로 따질수 없는 것입니다.

천마도의 채화판은, 자작나무껍질을 여러겹 겹치고 맨 위에 고운 껍질로 누빈후

가장자리에 가죽을 대어 만든것입니다.

천마는 꼬리를 세우고 하늘을 달리는 모습으로 혀를 내민듯한 입의 모습은

신의 기운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흰색의 천마가 동물의 신으로서 죽은 사람을 하늘의 세계로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합니다.

 

천마도의 수건을 받으신분은 아마 천마를 타고 도솔천에 환생하실것으로 믿습니다. ㅎ ㅎ

 

천년의 미소

천년의 미소 라는 말이 문화계에 많이 떠도는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산행중에도 안내판이나 곳곳에 기와조각 모형의 안내판 이 있었고

시내곳곳에도 이러한 것들이 보입니다.

 

도데체 이것이 무엇이며 어떤 사연 있길래 - - - - ?

 

         얼굴무늬 수막새

 

천년의 미소 라고 한다면 금동미륵반가 사유상의 미소도 있지만 여기서는 "수막새"기와에 담긴

어머니의 미소에 대해 말해보고자합니다.

신라시대 수막새 기와의 무늬는 연화무늬[蓮華文]가 대부분이며, 보상화(寶相華), 당초(唐草),

천인(天人)과 문자(文字)등 실로 다양하지만  영묘사터[靈廟寺址]에서 출토된

 얼굴무늬 수막새는 사람의 얼굴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우리는 어릴때 논밭이나 들길에서 수없는 기와조각을 보아왔고,

그 조각을 줏어 깽깨미라는 놀이도 하고, 어깨어 놋그릇닦는 가루로도 사용하고

흙담을 쌓을때 돌대신 기와조각을 쌓아 넣고 하며 옛 기와 조각을

그렇게 모두 없에 버렸읍니다.

 

신라때의 기와는 일정 모형을 막 찍어 내는것이 아니라  귀면와 와 같이 그 지역

그 시대 그 건물의 역할과 주인의 취향과 바램에 따라 기와에 그 염원을 담아낸

작품 들이기에 참으로 진귀한 여러가지 형태의 예술품들이 많았습니다.

귀면와

경주 영묘사 터에서 발견된 이 미소짓는 아낙의 기와조각에 대한 내력을 말해 보자면-,

제작 연대는 삼국말 무렵[7세기]이라 추정하며.

당시 큰 사찰이나 궁궐 또는 공공기관의 건축을 할때면, 전국의 장인들을

소집하여 건축을 하였고- -

동원된 장인들은 건물이 준공되어야 고향에 돌아갈수 있었다.

 

어느날 한 젊은 장인이 작업이 끝난 저녁 무렵 일터의 한켠에서 쉬고 있는데

하늘에 뜬 둥근달이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 얼굴로 비추어졌다.

이 장인은 가지고 있던 진흙반죽으로 그리운 어머님의 얼굴,

살포시 미소짓는 어머님얼굴을 정성들여 다듬어 내었다.

이 장인은 공사기간 내내 그리운 어머니의 향수를 이것으로 위안 삼았겠지요 

 

공사는 준공이 되고 준공된 그 건물이 낡고 허물어져 흔적조차 없어진 천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날  그자리에서 깨어진 기와 조각이 발견 되었습니다.

천년이나 묻혀있었던 보고싶었던 그리운 어머님의 미소 입니다.

콧대는 오똑하며 그 좌우에는 행실형(杏實形)의 눈을 만들었는데 

 입은 얼굴 왼쪽 턱이 결실되어 확실한 모양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오른쪽 볼이 왼쪽 볼보다 튀어

나온 점과 그 아래쪽 입 모양으로 보아 수줍음이 흡뿍 담긴 해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효의 상징인 천년의 미소, 어머니의 얼굴을 준비해 드렸습니다.

 

모쪼록 경기도에서 여기 까지 찾아 주셨는데 

말 주변이 없어서 제대로 안내를 해 올리 지 못했습니다. 

미흡하나마 이 설명으로 조금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안양 산죽회 회원님들과 그 부모님 자녀들 모두

도솔천에 환생 하시기 합장 기원 합니다.

 

특히 회장님 귀한 선물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竹田  서  동  기  올림

 

신라 그 천년의 미소 
                              이 서 원
어느 집 처마끝쯤
기와장에 그려넣은
조금은 아프고도
또는 좀 슬프뵈는
숨겨 온 아득한 미소
누이같은 얼굴이여!

저 깊은 그리움에
얼굴은 반쯤 묻고
햇살의 눈부심에
살포시 다문 입술
신라 그 천년의 환희
수막새에 남아있네.

누군들 웃지 않고
살지는 못하지만
한 세상 또 한 세상
저렇게 환하다면
나 또한 향기 가득한
얼굴이고 싶었네.


 

웃는 기와

        이봉직/초등학교 5학년 1학기 교과서에 실린 동시

옛 신라 사람들은

웃는 기와로 집을 짓고

웃는 집에서 살았나 봅니다

 

기와 하나가

처마 밑으로 떨어져

얼굴 한쪽이

금가고 깨졌지만

웃음은 깨지지 않고

 

나뭇잎 뒤에 숨은

초승달처럼 웃고 있습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한 번 웃어주면

천 년을 가는

그런 웃음을 남기고 싶어

웃는 기와 흉내를 내 봅니다

 

감사 합니다

 

산천초목 (山 川 草 木) 11.12.06. 17:52

竹田 님,감사합니다,저는 몸이 불편하여 함께 하진 못했어도 사진과 곁들인 해설을 읽어보며 함께 참견한듯 합니다,
돌뿌리(김석근님)의 친구로 우리 안양산죽회를 위해 이렇게 좋은 자리를 이끌어 주심에 다시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경주남산의 기 를 받아 항상 행복한 시간 되시길 기원 합니다,,
 
 
 竹田 서동기 11.12.07. 10:07
회장님 감사 합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요 -
 
 
 봄꽃 11.12.06. 18:51
바쁘신 중에도 기어이 우리 산죽회를 위해서 귀한 시간을 내어주신 죽전님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덕분에 그냥 지나쳐 버릴 뻔했던 우리조상의 숨결이 담긴 문화 유산 애기를 잘 들었고 또한 글까지 남겨주셔서해석을 곁들이니 정말로 감사합니다 덕분에 의미있는 산행 이었습니다
 
 
 竹田 서동기 11.12.07. 10:09
감사 합니다. 봄꽃, 정이 묻어나는 소박한 예명 이네요. 복 받으십시요 -------
 
 
 두메산골 11.12.06. 21:09
죽전님.귀한시간 함께하셔서 울님들 경주남산의 참모습을 보게되는 유익한 시간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함께하진 못했지만 많이 감사합니다.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竹田 서동기 11.12.07. 10:10
감사 합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요
 
 
 하로동선 11.12.07. 09:57
죽전님
신라 6대왕 지마왕릉/이사금(성씨:박)에서 사진을 찍으셨군요..
신라 8대왕 아달라/이사금(성씨:박)왕도 있었습니다. 혹시 재미난 얘기가 있나요?
 
 
 竹田 서동기 11.12.07. 10:15
ㅎ ㅎ 옛날 이야기들이야 찾으면 많이 있겠죠. 산죽회 덕분에 하루 잘 놀았습니다. 감사 합니다.
 
 
 돌부리 11.12.07. 17:56
친구! 좋은 시간을 만들어 주고, 자료까지, 정말 고맙소.
 
 
 竹田 서동기 11.12.08. 10:28
부족해서 미안하네 -
 
 
 산동무 11.12.08. 20:01
귀한 시간 함께해서 경주 남산을 잊을수가 없을 거예요. 정말 숙 많았어요. 감사 합니다. 건강 하세요.
 
 
 竹田 서동기 11.12.09. 11:12
감사 합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요 -